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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김만덕의 어린 시절, 결핍이 만든 판단력과 나눔의 철학

by onary 2025. 11. 15.

김만덕을 떠올리면 '제주를 구한 거상'이라는 말이 먼저 따라온다. 하지만 그 나눔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마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고픔과 불안 속에서 하루를 견디며, 사람의 사정을 먼저 보게 된 경험이 그녀의 바탕이 되었다.

1794년, 제주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김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사들였다.

육지에서 배로 실어 온 쌀과 보리로 천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건졌다. 정조는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그녀에게 금강산 유람의 기회를 주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그것도 상인 출신 여성에게 주어진 전무후무한 영예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아니, 처절했다.

이 글은 김만덕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결핍이 어떻게 리더십의 씨앗이 되었는지 따라가 본다.

한복을 입은 어린 김만덕이 천을 바느질하며 성장의 희망을 꿈꾸는 장면, 그녀의 어린 시절을 표현한 일러스트


📌 이 글은 '한국을 움직인 여성 리더들'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시리즈 전체 글: [한국을 움직인 여성 리더들]

 

1. 굶주림 속에서 배운 생존의 지혜

김만덕은 1739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유년기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 하루 한 끼로 버티는 날도 있었고, 장터에 나가 작은 물건을 팔며 집안 살림을 돕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18세기 제주는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땅이었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농사짓기는 어려웠고, 육지와의 교역도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제주는 조선 정부의 유배지이자 공물을 강요당하는 곳이었다. 말(馬)과 해산물을 공물로 바쳐야 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었다. 어린 만덕은 친구들과 한가롭게 놀기보다 시장 어귀에서 어머니의 손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돈이 '많이 버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장사는 하루아침에 큰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작게 벌고 아껴서 오래 버티는 힘이 필요했다.

만덕은 장터에서 관찰하는 아이였다. 남이 버린 천 조각을 모아 바느질을 하고, 상인들의 잔돈을 세어 보며 값의 차이를 익혔다. 어떤 물건이 언제 잘 팔리는지, 흥정이 오가는 순간에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작은 변화들을 마음속에 쌓아두었다. 부모가 따로 알려주지 않아도, 그녀의 손끝은 자연스럽게 계산을 배워갔다. 그 시절 만덕에게 돈은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였다. 오늘을 넘기기 위해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그 판단이 곧 삶을 지키는 기술이 되었다.

 

2. 어린 나이에 겪은 차별과 좌절

조선 시대에 여성이 상업의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가 장터에서 값을 맞추고 돈을 세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었다. 어른들은 가볍게 웃으며 흘려보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여자가 무슨 돈을 세냐", "시집이나 잘 가라"는 말들이 일상적으로 쏟아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경제 활동은 제한되었다.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여성은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굳어졌다. 만덕은 그런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똑히 봤다. 세상은 재능보다 먼저 '누가 하는가'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만덕이 움츠러들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낮에는 천 조각을 팔고, 밤에는 등잔불 아래서 장부의 숫자들을 따라 적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관찰이었지만, 만덕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공부였다. 그녀는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실력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3. 고난이 남긴 상실, 그리고 규칙 안에서 길을 찾는 법

청소년기에 접어든 만덕은 더 큰 고난을 겪었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게 되면서, 삶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부모를 잃은 만덕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 여성이 혼자 생계를 꾸려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의지할 곳을 찾았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만덕은 기생이 되는 길을 택했다. 당시 고아나 빈곤층 여성에게 기생은 드물지 않은 선택이었다. 기생 생활은 고달팠지만, 만덕은 여기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생으로 지내면서도 틈틈이 장사를 배웠다. 기생들 사이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았고, 작은 이익을 남기는 법을 익혔다. 무엇보다 양반들과 상인들의 대화를 듣고 경제의 흐름을 읽었다. 그리고 20대 중반, 만덕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돈을 모아 양민 신분을 회복한 것이다. 『정조실록』에는 "만덕이 스스로 기적(妓籍)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신분 상승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만덕은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 하지만 만덕은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규칙을 억지로 부수기보다, 그 규칙의 틈에서 길을 찾는 법을 익혔다. 어떻게 해야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일을 이어갈 수 있는지, 누구와 손을 잡아야 안전한지, 어떤 방식이 오래갈 수 있는지 현실적인 판단을 쌓아갔다.

양민이 된 만덕은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제주의 특산물인 전복, 미역, 말총 등을 육지로 실어 나르고, 육지의 곡식과 필요한 물품을 제주로 가져왔다. 해상 무역은 위험했지만 이익도 컸다. 만덕은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만덕은 혼자만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모여 일할 수 있는 작은 일터를 만들고, 서로 도우며 일을 나눴다. 자신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죽을 나눠 주곤 했다. 그 행동은 '착한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는 배고픔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어른들의 눈빛이 어떤 순간에 무너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덕은 이때부터 조금씩 깨닫는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누군가의 오늘을 덜 힘들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4️⃣ 1794년 제주 대기근, 결핍을 겪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선택

1794년, 제주에 대흉년이 들었다. 가뭄과 태풍이 연달아 몰아쳐 농사는 거의 전멸했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제주 목사는 조정에 긴급 구호를 요청했지만, 육지에서 곡식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때 김만덕이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과 보리를 사들였다. 몇 차례에 걸쳐 배에 곡식을 가득 실어 제주로 들여왔고, 이를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정조실록』에는 "만덕이 사재를 털어 곡식을 구입하여 천여 명을 구제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김만덕은 제주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쌀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거상'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시작은 결코 거창하지 않았다. 그녀의 나눔은 어린 시절의 배고픔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조정에서는 "만덕의 선행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며 포상을 논의했다. 정조는 만덕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고, 만덕은 금강산 유람을 청했다. 여성이, 그것도 상인 출신 여성이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정조는 이를 허락했다. 결핍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 만덕에게 결핍은 '사람을 읽는 눈'이 되었다. 누가 정말 절박한지, 어떤 도움은 한순간의 동정으로 끝나는지, 어떤 지원이 오래 버틸 힘이 되는지,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체득했다. 그래서 그녀의 나눔은 감정적이지 않았다. 현실을 아는 사람의 방식으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리더십에 가까웠다.

만덕은 곡식을 그냥 나눠주지 않았다. 가장 절박한 사람부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배했다. 어린 시절 굶주림을 겪었기에, 배고픔의 단계를 알았다. 누가 진짜 굶주리고 있고, 누가 조금 더 버틸 수 있는지 구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김만덕의 구호를 가르는 차이였다. 만덕이 특별했던 점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돈을 벌어본 사람만이 아니라, 배고픔을 견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는 데 있다. 그녀는 '어떤 고통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더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5️⃣ 어린 시절의 결핍이 만든 '나눔의 리더십'

김만덕의 리더십을 이해하려면, 그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첫째, 굶주림 속에서 익힌 경제 감각. 어린 만덕은 시장에서 계산을 배웠고, 작은 이익을 남기는 법을 익혔다. 이것이 훗날 제주 최고의 상인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둘째, 차별 속에서 키운 실력.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했지만, 만덕은 실력으로 증명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결과로 보여줬다.
셋째, 고난 속에서 배운 연대. 혼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것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래서 성공한 뒤에도 공동체를 잊지 않았다.
넷째, 결핍 속에서 얻은 공감 능력.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만이, 진짜 굶주린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만덕의 나눔은 동정이 아니라 공감에서 시작되었다.

 

🌸 결론: 김만덕의 어린 시절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김만덕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기록만은 아니다. 그 시간은 나눔의 리더십이 자라난 토양이었다. 그녀는 배고픔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고, 차별 속에서도 실력을 쌓았으며, 상실 속에서도 길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결국 '혼자 잘되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로 돌려놓았다.

김만덕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돈이 아니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은 공동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이다. 그리고 그 철학은 어린 시절의 굶주림, 청소년기의 고난, 그리고 평생 잊지 않은 연대의식에서 나왔다.

김만덕의 유년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결핍은 사람을 멈추게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도울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가난 속에서 배운 손의 온기, 그 온기가 결국 제주를 살린 힘이 되었다고.

제주의 소녀는 조선 최고의 거상이 되었고, 거상은 자신의 전부를 내놓는 리더가 되었다.

이것이 김만덕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결핍이 만든 나눔의 철학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사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조선왕조실록, 김만덕 구휼 기록
  • 『만덕전』(萬德傳) - 김만덕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
  • 『제주읍지』(濟州邑誌) - 제주 지역 기록

참고 서적

  • 양진건, 『제주 의녀 김만덕』, 각, 2007
  • 강만길, 『한국의 여성사업가』, 창작과 비평사, 2001
  • 김은실, 『의녀 김만덕 평전』, 푸른역사, 2006
  • 제주여성사 연구회, 『제주여성, 역사를 말하다』, 각, 2004
  • 이숙인,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 글쓰기로 세상을 열다』, 너머북스, 2012

학술 논문

  • 고창석, "김만덕의 생애와 구휼 활동", 『제주도연구』
  • 양진건, "18세기 제주 여성상인의 경제 활동", 『여성과 역사』
  • 김동전, "조선후기 제주 상업과 여성의 역할", 『한국사연구』
  • 강만길, "김만덕의 사회적 공헌과 역사적 의의", 『역사학보』

관련 기관

  • 제주특별자치도 김만덕기념관
  • 제주여성사 연구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 정보시스템
  • 김만덕기념관 

※ 본 글은 『정조실록』과 『만덕 전』을 비롯한 사료와 관련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김만덕의 어린 시절과 리더십 형성 과정을 조명한 해석적 글입니다. 김만덕의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제한적이며, 당시 제주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그녀의 행적을 종합하여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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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