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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최재형의 어린시절, 가장 가난한 소년이 가장 큰 희망을 품다

by onary 2025. 12. 14.

가난한 소년으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한 최재형.
차별과 고난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은
훗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따뜻한 불씨가 되었다.

19세기 말 눈 덮인 만주 마을에서 작은 책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
가난과 추위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조국의 미래를 꿈꾸던 최재형의 어린 시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

 

186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소년.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년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거부가 되었고, 그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쳤다. 일본은 그를 두려워했고, 결국 1920년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최재형의 별명은 '한인 사회의 대부', '독립운동의 은행'. 안중근, 이상설, 이동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어떻게 가장 가난한 소년이 가장 큰 희망을 품게 되었을까?

1. 얼음보다 차가운 현실에서 태어난 소년

1860년대 함경도 경흥, 겨울은 길고 고달팠다. 바람은 산등성이를 넘어와 초가집 벽을 때렸고, 아침이면 굴뚝마다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최재형. 그의 집은 누추했고, 밥상 위에는 늘 보리쌀보다 나물이 많았다.

1860년대 함경도는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척박한 땅, 짧은 여름, 긴 겨울.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에서 백성들은 굶주렸다. 1869년 대흉년이 들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떠났다.

어머니는 작은 손으로 굳은살이 배어 있는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재형아, 공부는 못 시켜도 사람답게는 살아야 한다." 소년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몰랐지만, 그녀의 눈빛이 무겁게 가슴에 남았다.

그의 유년은 곤궁 그 자체였다. 겨울이면 신발이 없어 발이 얼어붙었고, 봄이면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는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잃지 않았다. 눈 속에 찍힌 짐승 발자국, 나무에 핀 얼음꽃, 마을 어른들의 대화 속 단어 하나하나까지 그는 기억했다.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말했다. "저 산 너머엔 나라가 있다더라. 러시아라던가…" 소년은 그 말을 들으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산 너머 세상엔… 다른 삶이 있을까?' 그의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세상'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2. 가난을 견디며 배운 세상의 부조리

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빚을 갚지 못해 관아에 불려 갔다. 그날 밤, 재형은 굴뚝 옆에서 어머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왜 글을 아는 사람들만 우리를 힘들게 하나요?" 그녀의 울음은 아이의 마음에 질문으로 남았다.

'글을 알면,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속지도 않겠구나.'

조선 후기 농민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계약서를 읽지 못해 땅을 빼앗기고, 빚 문서를 이해하지 못해 노비가 되었다. 지배층은 이 무지를 이용했다. 최재형은 어린 나이에 이 구조를 직감했다.

그날 이후 그는 주워온 종잇조각마다 글자를 흉내 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글자에, 그의 손은 이미 연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장터에서 서책을 보던 양반이 말했다. "이건 네가 볼 게 아니야. 흙손으로 글을 더럽히지 마라." 그 말에 그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날 밤,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기며 되뇌었다. '배워야 한다. 나라도, 나 자신도 구하려면.'

그에게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공평함이야말로 그를 성장시킨 스승이었다.

 

3. 새로운 땅, 새로운 차별 속으로

기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마을의 논밭은 메말랐고, 사람들은 떠났다. 그의 가족도 결국 집을 정리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1869년, 최재형의 가족은 두만강을 건넜다. 당시 10세 소년이었다.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가는 길은 험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야 했고, 러시아 국경 수비대를 피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한겨울,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재형아, 저기 건너가면 새 세상이야."

하지만 새 세상은 더 냉혹했다. 러시아 마을의 조선인은 이름 대신 '조센징'이라 불렸고,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에서 일했지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이등 국민'이었다. 토지 소유권이 제한되었고, 교육 기회도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조선인을 '게으르고 더러운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재형은 머슴살이를 하며 주인집 아이들이 버린 교과서를 몰래 주워 읽었다. 낯선 글자, 러시아어 알파벳. 그는 밤마다 그 글자를 돌에 새기며 익혔다.

'이 글을 알면, 나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는 러시아 말을 익히며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조선"과 "러시아", 두 세계가 동시에 존재했다. 그는 스스로를 경계에 선 아이로 느꼈다. "나는 조선 사람인가, 러시아 사람인가?" 하지만 그 경계는 그에게 두 배의 시야를 선물했다.

 

4. 배움의 의미를 깨달은 청년 시절

청소년기가 되자 그는 통역 일을 맡게 되었다. 러시아 상인과 조선인 농민 사이를 오가며 말을 이어줬다. 그때마다 그는 두 나라의 불평등을 절실히 느꼈다. 러시아 상인은 말로 계약을 바꾸었고, 조선 농민은 그것을 몰라 속아 넘어갔다.

그는 밤마다 노트를 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언어는 칼보다 강하다. 나는 이 칼을 써야 한다."

1880년대,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상사에 취직했다. 처음에는 잡일부터 시작했지만,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그는 빠르게 승진했고, 무역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번 돈으로 헌책방에서 서적을 사 읽었다. 러시아의 법, 교육제도, 산업 구조— 그는 그것들을 흡수하며 생각했다. "조선도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날, 스스로의 삶의 방향을 정했다. '나는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울 것이다. 아이들이 나처럼 눈물로 글을 배우지 않게 하겠다.'

그 결심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겪은 절망과 불공평의 체험이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5.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신념

20대 중반, 그는 마침내 러시아 상업 회사의 하급 관리로 일하며 안정적인 수입을 얻었다. 그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아끼며 사나?" 그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듭니다."

1890년대, 최재형은 독자적으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러시아와 조선, 중국을 오가며 곡물, 모피, 목재를 거래했다. 정직한 거래와 신용으로 사업은 번창했다. 1900년대에는 연해주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 일부를 개조해 조선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책상 대신 나무 상자, 종이 대신 모래판. 아이들은 낡은 옷을 입고 앉아 그의 손끝을 따라 글자를 익혔다.

"이 글자는 '나'야. 그리고 이건 '나라'야. 너희가 이걸 함께 쓸 줄 알게 되면, 나라가 생기는 거야."

1899년,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학교를 설립했다. '한민학교'로, 연해주 최초의 한인 민족 학교였다.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고,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학교는 훗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그의 수업은 단지 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존엄과 희망을 가르쳤다. '우리는 작지만, 무력하지 않다'는 믿음이 그때 그 교실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6. 조용하지만 단단한 저항의 시작

세월이 흐르며 조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혹했다.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최재형은 이 소식을 듣고 결심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그때 최재형은 러시아의 조선인 사회에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한 번은 동료가 물었다. "이 싸움이 과연 가능할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능하지 않더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침묵했으니까."

1908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 그 배후에 최재형이 있었다. 안중근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거사를 도왔다. 의거 후 일본 경찰이 최재형을 추적했지만, 러시아 국적이라는 보호막이 있었다.

그는 재산을 팔아 독립군을 지원했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보냈다. 그의 집은 언제나 누군가의 은신처였다. 문을 두드리면 그는 늘 말했다. "들어오시오. 여긴 안전하오."

이상설, 이동휘, 홍범도, 김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최재형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집은 '독립운동의 본부'였고, 그의 돈은 '독립운동의 은행'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배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7. 가장 낮은 자리에서 빛난 이름, 그리고 비극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최재형은 더 많은 자금을 지원했고, 더 많은 독립군을 숨겨주었다. 일본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공했다. 명분은 '빨치산 토벌'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한인 학살이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군은 무차별적으로 한인들을 학살했다.

4월 5일 새벽, 일본군이 최재형의 집을 포위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60세의 노인은 침착하게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일본군 장교가 물었다. "당신이 최재형이오?" "그렇소."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소?" "그렇소. 나는 조선 사람이오."

그날, 최재형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함께 있던 아들 최봉준도 함께 희생되었다.

일본군은 최재형의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했다. 그가 평생 모은 재산, 그가 세운 학교, 그가 지원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1930년대 초, 그는 점점 늙어갔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평생 남을 위해 살았습니까?"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릴 적 굶주린 날,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주었소. 그때 다짐했지요.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밥이 되겠다고."

그의 생애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눈보다 밝았다. 그가 세운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 중 일부는 훗날 독립군, 의병, 언론인이 되어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재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어딘가, 이름 없는 땅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 마무리: 가난이 만든 거부, 거부가 만든 독립의 희망

최재형의 어린 시절은 단순히 가난의 기록이 아니라, 신념이 태어난 과정이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그 소년은, 결국 수많은 사람의 미래를 지켜낸 어른이 되었다.

최재형이 남긴 유산:

  • 한민학교를 비롯한 수십 개의 한인 학교
  • 안중근 의거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 지원
  • 연해주 한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신념

그의 인생은 말보다 행동으로 쓰인 교과서였다. 지금의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배움과 나눔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함경도의 가난한 소년은 연해주의 거부가 되었고, 그 거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쳤다.

이것이 최재형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가난이 만든 독립의 희망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사료 및 기록

  • 『독립운동사자료집』 - 국가보훈처
  • 『한국독립운동사』 - 국사편찬위원회
  • 『안중근 의사 전기』 - 안중근의사숭모회
  • 러시아 연해주 한인 이주사 관련 문서

참고 서적

  • 반병률, 『최재형 평전』, 범우사, 2005
  • 김필영, 『연해주의 한인들』, 이론과 실천, 1989
  •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일조각, 1985
  • 이윤섭, 『러시아 한인의 역사』, 국학자료원, 2004
  • 심헌용, 『안중근 평전』, 경인문화사, 1999

학술 논문

  • 반병률, "최재형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김필영, "연해주 한인 사회와 민족교육", 『역사학보』
  • 윤병석, "안중근 의거와 최재형의 역할", 『한국사연구』
  • 이윤섭, "러시아 한인의 정착과 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관련 기관

  • 국가보훈처
  • 독립기념관
  • 안중근의사기념관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사이트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기념관  
  • 안중근의사기념관  

※ 본 글은 독립운동 관련 사료와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최재형의 어린 시절과 독립운동 과정을 조명한 글입니다. 최재형의 어린 시절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제한적이며, 당시 함경도와 연해주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토대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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