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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배움의 힘

by onary 2025. 11. 17.

1397년, 한양 준수방에서 태어난 세 번째 왕자. 그 누구도 이 소년이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왕위 계승 서열 3위, 형들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자라던 소년.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자라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은 단순한 왕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외로움 속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한 소년이, 어떻게 조선의 가장 위대한 리더가 되었는지 그 성장의 비밀을 전합니다.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배움의 힘

 

* 이 글은 [조선 대표 성군들의 어린 시절, 왜 조선의 성군들은 하나같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까] 글의 세부 인물입니다.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1. 왕의 자식이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소년

세종은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겉으로는 왕자였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형 양녕대군은 총명했지만 자유분방했고, 세종은 늘 그 뒤에서 조용히 책만 읽는 아이로 평가받았다. 당시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였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위로는 양녕대군(이제), 효령대군(이보)이 있었다. 조선의 왕위 계승 원칙상 장자 계승이 원칙이었기에, 셋째 아들 이도가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궁궐 속에서도 그는 마음껏 말하지 못했다. 왕자의 언행은 곧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세종은 "침묵 속의 관찰자"로 성장했다. 세상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태종의 왕위 찬탈은 어린 세종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400년 1차 왕자의 난, 1402년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태종은 왕위에 올랐다. 어린 세종은 3세부터 5세 사이에 궁궐 내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목격했다. 외척과 공신들의 숙청, 형제간의 다툼. 이 모든 것이 어린 왕자의 눈에 들어왔다.

『태종실록』에는 어린 세종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충녕대군(세종)은 총명하되 드러내지 않고, 학문을 좋아하되 자랑하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깊이 관찰하는 아이였다.

 

2.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책과 친구처럼 지냈다. 어느 날, 궁궐 서고에서 『논어』를 꺼내 읽다 이런 말을 접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그 문장을 읽은 어린 세종은

"배움은 즐거움이며, 백성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세종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종실록』에는 "임금이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학문을 토론하셨고, 밤이 깊도록 책을 놓지 않으셨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나온다. 신하들이 "전하, 눈을 쉬게 하소서"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부터 세종은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서, 천문학, 의학, 농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특히 『대학』, 『중용』, 『논어』, 『맹자』 같은 사서는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깊이 사색하고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했다. 그 후로 그는 병이 나도 책을 놓지 않았고, 서고의 불빛이 꺼질 때까지 공부했다. 이는 훗날 그가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기초 체력이 되었다.

세종의 과도한 독서는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안질(눈병)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신하들이 "책을 멀리하시고 눈을 쉬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지만, 세종은 "한 글자라도 더 읽어야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며 듣지 않았다.

 
 

3. 외로움 속에서 리더십을 배우다

세종의 어린 시절엔 늘 '외로움'이 있었다. 형과의 비교, 왕위 서열에서 오는 부담,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과한 책임감. 그 외로움이 그를 무너뜨리지 않고 단련시켰다.

셋째 왕자라는 위치는 미묘했다. 장자인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되어 모든 관심을 받았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해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셋째 충녕대군(세종)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세자도 아니고, 특별한 재능으로 주목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애매한 위치가 세종에게는 축복이었다. 세자에게 쏟아지는 과도한 관심과 압박에서 자유로웠고, 그 덕분에 온전히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린 세종은 신하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까?"를 스스로 묻곤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듣는 법을 아는 리더'였다. 훗날 즉위 후에도 백성의 말을 듣고, 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태종실록』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태종이 세 아들을 불러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양녕대군은 즉흥적으로 답했고, 효령대군은 불교적 관점에서 답했지만, 충녕대군은 한참을 생각한 뒤 역사적 사례를 들어 조리 있게 답했다고 한다.

 
 

4. 형 양녕대군과의 관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세자 책봉

1418년, 세종의 인생이 급변한다.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고, 세종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양녕대군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었다.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 민가를 드나들고, 기생과 어울리며, 세자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

『태종실록』에는 "세자가 밤마다 궁을 나가 놀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태종은 고민 끝에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조선 왕실에서 드문 일이었다. 장자 계승 원칙을 깨고 셋째를 세자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괴로워했다. 형을 밀어내고 자신이 세자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갑자기 떠맡게 된 무거운 책임. 21세의 젊은 왕자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학문적 기반,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을 위한다는 철학이 그를 지탱했다.

 

5. 세종의 배움이 만들어 낸 리더의 품격

세종은 단순히 총명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배움의 본질을 이해한 왕이었다. '배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철학이 그의 리더십의 근간이었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한 것이 그 증거다. 세종은 즉위 2년 만에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연구하고, 정책을 제안하며, 왕과 토론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길 즐겼다. 그래서 그는 과학자 장영실에게 신분의 한계를 넘어 발명에 몰두하게 했고, 농부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농사직설』을 만들게 했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 리더십의 정점이었다. 양반들은 반대했다.

"중국 글자로 충분하다.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진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어린 시절의 조용한 관찰력과 공감능력이, 훗날 백성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적 정치로 꽃 피운 것이다.

 

세종은 과학, 예술,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었다.

  • 측우기,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발명
  • 『칠정산』 편찬으로 독자적 역법 확립
  • 『향약집성방』으로 의학 발전
  • 4군 6진 개척으로 국토 확장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어린 시절 쌓은 학문적 기초와 "배움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에 있었다.

 

🌸 결론: 세종의 어린 시절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세종대왕의 유년기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고독 속에서도 배움의 기쁨을 잃지 않았고, 침묵 속에서도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셋째 왕자라는 애매한 위치. 형들과의 끊임없는 비교. 왕실 정변의 목격. 과도한 독서로 인한 건강 악화. 모든 것이 세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세종의 어린 시절은 말한다.

"배움은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나와 세상을 바꾼다."

단지 위대한 왕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배움을 이어갈 때 세종의 정신은 다시 살아난다. 세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업적이 아니다. 그것은 "배움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이다. 그리고 그 철학은 외로운 셋째 왕자가 책과 함께 보낸 수많은 밤에서 태어났다.

조용한 소년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되었고, 그 성군은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들었으며, 그 글자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이것이 세종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만든 배움의 힘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사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太宗實錄) - 조선왕조실록
  • 『훈민정음』(訓民正音) - 세종 창제 문자 해설서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왕조 건국 서사시

참고 서적

  • 박현모, 『조선의 왕, 경연에 나가다』, 글항아리, 2014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5
  • 강문식, 『세종, 소통과 배려의 리더십』, 민음사, 2013
  •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15
  • 신병주, 『세종처럼』, 중앙북스, 2019

학술 논문

  • 박현모, "세종의 학문과 정치사상", 『한국사상사학』
  • 강문식, "세종의 집현전 운영과 학문 정책", 『조선시대사학보』
  • 김문식, "세종의 교육과 인재 양성", 『교육사학연구』
  • 전경목, "세종의 리더십과 소통 방식", 『역사학보』

관련 기관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한글박물관

참고 사이트

  • 문화재청 궁중문화 정보시스템
  • 국립고궁박물관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본 글은 『세종실록』과 『태종실록』을 비롯한 사료와 관련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과 리더십 형성 과정을 조명한 해석적 글입니다. 세종의 어린 시절 심리와 동기에 대해서는 사료의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여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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