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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윤동주의 유년 시절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성장 배경

by onary 2025. 11. 19.

1️⃣ 만주의 아이, 조국을 가슴에 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조선이 아닌 낯선 땅에서 시작된 그의 삶은 일반적인 유년기와는 달랐다. 그가 자란 북간도 지역은 독립운동가와 실향민들이 모여들며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공간이었다. 가족은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된 가정이었으며, 외삼촌 송몽규는 청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인물로, 윤동주에게 정신적 영향을 끼친 첫 어른이었다.

그의 아버지 윤영석은 자녀 교육에 적극적이었고, 집안에서는 항상 조선어를 사용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는 조선어 사용 자체가 ‘조용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윤동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언어와 정체성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이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언어를 붙들고 신앙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며, 그는 '나'라는 존재가 혼자가 아니라 역사의 일부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린 윤동주는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드렸고, 성경 말씀과 시편의 운율 속에서 ‘말’과 ‘의미’가 만들어내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은 단순히 신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책임감도 동시에 강조했다. 윤동주의 집안에서는 ‘나라 없는 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시민’이 아닌 ‘민족의 아들’로 자각하며 자랐다. 주변 어른들은 그에게 조선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동주’는 ‘동쪽 나라의 별’이라는 의미를 지닌, 민족적 정체성을 반영한 상징이었다.


2️⃣ 활자와 친해진 소년, 글쓰기로 자신을 찾아가다

어린 윤동주는 또래보다 조숙했고, 무엇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집에는 늘 책이 있었고, 가족 모두가 독서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그는 한글 동요책과 성경책을 함께 읽으며 자라났고, 독서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그의 비밀 친구였고, 그 안에서 그는 세상에 말하지 못하는 감정과 질문을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에 대한 고민과 ‘조선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의문이 글의 주제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윤동주는 교내 백일장에 나가 시상을 받을 정도로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교사들은 그의 문장을 보고 감탄했고, 그의 글에서는 또래와는 다른 시선과 어휘가 엿보였다고 회상했다. 문장을 정갈하게 다듬는 습관도 이때부터 길러졌다. 그는 생각이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기에, 말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종이에 써 내려가며 내면을 정리하는 편이었다. 이는 훗날 그의 시 세계가 감상적이면서도 깊은 사유를 품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윤동주는 자신이 읽는 책과 세상을 연결하는 훈련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해나갔다. 그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흡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사는 현실과 비교하며 이해했다. 예를 들어, 성경 속 인물들이 겪는 고난을 조선인의 현실과 연결 지으며, 정의와 저항에 대한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린 소년에게 ‘삶은 곧 질문이고, 시는 그 질문을 던지는 도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윤동주에게 단순한 표현이 아닌,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탐색이었다.


3️⃣ 학교 밖에서 길러진 비판정신과 시대 의식

윤동주는 정식 교육기관인 명동학교와 그 이후 평양의 숭실중학교, 그리고 이화학당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차례로 거쳤지만,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교육은 교실 밖에서 이루어진 ‘사적인 공부’였다. 그는 또래들과 함께 비밀 독서회를 조직해 금서로 지정된 조선 문학, 러시아 문학, 서양의 고전들을 탐독했고, 식민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식을 공유했다. 학교 교육이 일제의 정책에 의해 왜곡되어 있음을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직감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어 사용은 학교 안팎에서 금지되거나 제한되었고, 조선사를 가르치는 교사는 일제에 의해 처벌받기도 했다. 윤동주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어를 계속 쓰는 것 자체가 저항’이라는 생각을 품고 조선어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일본어로 시를 쓰라는 선생의 지시에 반발하며, “나는 내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발언은 단순한 고집이 아닌, 언어가 곧 정체성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윤동주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그의 사촌이자 절친이었던 송몽규와의 교류는 큰 영향을 끼쳤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한발 앞서 과격한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윤동주는 그를 통해 민족운동의 실체를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우리는 죽어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고, 윤동주는 이 말의 무게를 가슴 깊이 새기며 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 말을 하는’ 길을 선택한다. 문학은 그에게 있어서 검열과 억압을 넘어서기 위한 유일한 창구였고, 동시에 현실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4️⃣ 침묵의 시대, 시로 외치다

윤동주의 시 세계는 ‘침묵의 시대에 말하는 법’을 찾기 위한 고뇌의 산물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도 조선어로 시를 썼고, 이는 당시로선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교실과 거리, 기숙사 어디에서도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고, 친구가 밀고만 해도 체포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일본어로 자신의 시를 발표한 적이 없었다. “내 시는 내 말로 써야 한다”라는 신념이 그를 지탱했다.

대표작 「서시」는 그러한 내면의 고백이자 다짐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단순한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라는 자기 고백이었다. 그는 싸우고 싶었지만, 싸울 무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결국 시가 그의 무기였다. 시를 통해 그는 감정보다 신념을, 상황보다 의식을 전달하려 했다.

그의 시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민족의 고통이 중첩된다. 「참회록」에서는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며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시는 그렇게 쉽게 써지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예술에 대한 자기반성과 시대적 책임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윤동주는 결국 자신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을 시로 실천했다.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는 끝내 자신의 시들이 제대로 발표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세월이 지나면서 침묵의 시대에 외치는 가장 맑고 단단한 목소리로 남았다. 그는 그 어떤 정치 구호보다 순결한 문장으로, 그 어떤 투쟁보다 고통스러운 언어로, 민족의 양심을 기록한 시인이었다.

 

윤동주의 유년 시절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성장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