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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이순신의 유년기와 불굴의 인내가 만들어낸 조선의 구국 명장

by onary 2025. 11. 20.

1.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 그러나 누구보다 강직했던 소년

이순신은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중인 계층으로서 학문과 절제 있는 생활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는 자녀들에게 성실과 절제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태도를 강조했다. 어린 이순신은 또래보다 말수가 적고 사색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며, 외출보다는 집에서 활을 만들거나 목책을 세우며 노는 것을 즐겼다.

가정의 경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자립심과 책임감을 자연스럽게 배워야 했다. 특히 그는 어머니로부터 “군자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 말은 이후 그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로 작용하게 된다. 유년기의 이러한 교육은 단순히 말을 잘하거나 글재주만 뛰어난 아이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졌고, 이는 군인으로서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순신이 12세 무렵, 친구들과 나무검을 들고 장난을 치다가 친구의 잘못을 덮어쓰고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남 탓을 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짜 강한 사람”이라며 이순신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이 짧은 일화는 어린 이순신에게 ‘책임지는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새기게 한 계기였으며, 훗날 전쟁 중 모든 패배와 희생을 스스로 감당하려 했던 그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2. 낙방과 좌절 속에서 길러진 인내와 끈기의 가치

이순신의 성장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무과(무관 시험)에 응시했는데, 첫 시험에서는 안타깝게도 낙마하여 낙방하고 만다. 보통 사람 같으면 좌절하고 다른 길을 찾았을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탓하지 않고 칼을 갈 듯 훈련과 공부를 반복했다. 그는 다음 시험까지 매일 새벽에 일어나 활쏘기, 기병 훈련, 병서 읽기를 반복했고, 결국 32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한다.

어릴 적부터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이순신은 언제나 자신의 실력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과보다 과정에 집중했고,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도 어제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며 훈련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의 리더십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장수가 된 후에도 그는 병사들과 함께 잠을 자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직접 배를 타고 적의 동선을 파악했다. 다른 무장들이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으려 한 것과 달리, 이순신은 늘 “책임은 나의 것이고, 공은 병사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병사들에게 존경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묵묵함과 책임감,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태도는 그가 수많은 패배 없이 전쟁을 이끌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이었다.


3. 임진왜란, 유년기의 인내가 실천으로 전환된 순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순신은 이미 40대 후반의 중년 장수였다. 전란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작은 지방 관직을 전전하며, 중앙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장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고, 주어진 자리를 성실히 수행하며 전투 지형, 조선 수군의 한계, 일본군의 침략 방식 등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특히 그는 전쟁이 나기 1년 전부터 거북선 개발에 참여했으며, 훈련도를 정비하고 조선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었다.

그가 전투에서 처음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옥포해전이었다. 불과 수일 만에 일본 함선을 26척이나 격파하며 조선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그는, 이후 한산도 대첩, 당포 해전, 명량 해전 등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주목할 점은 그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병사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고, 싸우지 않고 이길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이 남긴 수첩인 『난중일기』에는 하루하루 병사들의 상태, 바람의 방향, 바다의 조류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철저한 준비와 자기 관리의 산물이었다. 그는 “싸움은 준비된 자가 이긴다”라는 철학을 실천했고, 이 철학은 유년기의 반복 훈련과 성찰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옥포해전 승리 후에도 그는 공을 내세우지 않았고, 단지 “하늘이 도왔을 뿐”이라며 전투 결과에 들뜨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4. 명량 해전의 기적, 그리고 유년기의 철학이 남긴 유산

이순신의 전쟁사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은 단연 명량 해전이다. 1597년, 그는 부당한 모함으로 투옥된 뒤 백의종군을 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당시 조선 수군은 겨우 13척의 배만 남아 있었고, 일본군은 130척 이상을 이끌고 명량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누구도 이순신에게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로 임금을 설득했고, 싸움을 준비했다.

그는 지형을 이용해 좁은 해협으로 적을 유인했고, 조류의 흐름과 적의 배치까지 철저히 분석해 싸웠다. 결국 이순신은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적의 대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와 철저한 준비, 병사에 대한 신뢰가 만든 결과였다.

그가 어린 시절 꾸준히 쌓아온 인내력, 반복된 자기 훈련,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자세가 없었다면 명량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병사들은 그가 싸우기 전에 울며 따라나섰고, 적군은 그의 이름만 듣고 물러날 정도로 그의 정신력과 판단력을 두려워했다. 이순신은 명량 이후에도 여러 해전을 이기며 조선을 지켜냈고,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는 전사하면서도 끝까지 싸움을 지휘했다.

그가 남긴 말,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라는 외침은 명장의 말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한 소년이 오롯이 자신의 소명을 다한 인간의 말이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단지 전투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한 사람의 일관된 정신에 있었다.

 

이순신의 유년기와 불굴의 인내가 만들어낸 조선의 구국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