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도 금기였던 시대, 글을 배우며 세상에 눈뜨다
박에스더는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시대는 조선 말기로, 여성에게는 정규 교육의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여성은 글을 배우는 일 자체가 ‘가문의 수치를 키우는 일’이라 여겨졌고, 여자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느질, 살림, 혼례 준비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 박유산은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가 있었고, 특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어린 박에스더는 다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정동제일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곳의 여성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식 기초 교육을 접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글을 읽지도 못할 시기에, 그녀는 선교사의 수업을 들으며 한글은 물론 영어의 알파벳을 익혀 나갔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가 그녀의 학습을 지지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머니는 “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영혼”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 이 말은 어린 박에스더의 마음에 평등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심어주었다.
이처럼 박에스더는 ‘여자는 글을 몰라도 된다’라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종교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열린 태도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열 수 있었다. 그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자체가 이미 특별한 사건이었으며, 이러한 유년기 경험은 훗날 그녀가 여성의 권리와 자립, 의료 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뿌리가 된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여성 교육의 결합이 만든 사명의식
십대 시절의 박에스더는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 교육기관에서 서양식 교양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북장로회 여성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교육기관에서는 성경, 영어, 위생, 기초 의학 등 실용적인 교육이 이루어졌고, 박에스더는 이 교육을 통해 여성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한 여성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여성도 하나님이 맡긴 일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려주었다.
이 시기에 박에스더는 자신이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것을 넘어, 지식을 통해 이웃을 돕고,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여성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거의 없었고, 남성 의사 앞에 나서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병든 여성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사례를 보며, 그녀는 직접 ‘여성 환자를 위한 여성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소명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당시 여성, 특히 조선 여성이 혼자 타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가족과 지역 사회의 반대도 컸다. 그러나 박에스더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길”이라며 유학을 결심했고, 이는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녀의 유년기와 십대 시절에 형성된 기독교적 사명감과 평등 의식, 그리고 약자를 위한 실천 정신은 결국 그녀를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로 이끄는 강력한 내면의 기반이 되었다.

의사가 된 이후, 여성을 위한 여성으로 살아가다
1890년대 후반, 박에스더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위치한 여성 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에 입학한다. 이곳은 미국 내에서도 여성 의사 양성의 요람으로 알려진 곳이었고, 당시 그녀는 조선 출신 유일한 학생이었다. 언어의 장벽, 인종적 편견,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박에스더는 학업에 열중하며, 마침내 1900년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그녀는 조선 최초의 정식 의사 면허를 받은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귀국 후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여성 전문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녀는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을 우선하여 치료했고, 진료비를 받지 않거나 자신의 생활비를 줄여 약을 사주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성병, 산부인과 질환 등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 어려웠던 질환에 대해 여성 환자들이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 결과 박에스더는 환자들 사이에서 ‘어머니 같은 의사’로 불렸다.
그녀의 의료 활동은 단지 질병을 고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병원 안팎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위생 교육, 출산 교육, 여성 교육도 병행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박에스더는 언제나 “여성은 조선의 절반이고, 그 절반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진다”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의사로서의 전문성과 기독교 신앙, 여성 인권 의식을 결합해 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떠오른다.
교육받은 여성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신념
박에스더는 의료 활동 외에도 여성 후배를 양성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보구여관 내에서 여성 간호사와 의료인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자신처럼 미국 유학을 희망하는 여성들에게 장학금과 추천서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지식은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 그 말처럼 교육받은 여성들이 또 다른 여성을 돕는 선순환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녀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주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박에스더는 늘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한 여성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병원을 찾기를 망설이자, 그녀는 스스로 그 집까지 찾아가 치료를 해주었다. 치료 후 환자가 “왜 직접 와주셨냐?”라고 묻자, 박에스더는 “배운 사람은 더 멀리 가야 하고, 더 무겁게 책임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사명감은 모두 그녀의 어린 시절 교육과 신앙에서 비롯된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 박에스더는 평등과 사랑, 책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어린 시절부터 삶의 기준으로 삼았고, 그것을 끝까지 실천해냈다. 그녀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지만, 그보다 더 많은 여성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겼다. 이처럼 박에스더의 삶은, 유년기의 가치관이 성인이 되어 어떻게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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