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중국 지린성 명동촌. 눈 덮인 작은 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윤동주(尹東柱). 그는 북간도의 가난한 마을에서 자랐고, 별을 세며 시를 쓰기 시작했고, 27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가장 아름답게 저항한 독립투사.
이것은 암흑의 시대에 별을 본 소년이, 시로 저항하고, 옥중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이야기다.

1. "여긴 조선이 아니에요" - 북간도의 이방인들
"엄마, 우리는 왜 여기 사나요?"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살 수 없어서란다."
"왜요?"
"일본이 우리 땅을 빼앗아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북간도로 이주했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들,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지식인들, 살 곳을 잃은 사람들.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갔다. 그곳에 조선인 마을을 만들었다. 명동촌(明東村).
윤동주는 바로 이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영석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학교를 세운 교육자였다.
어머니 김용은 자식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명동촌은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조선인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였다. 일본 경찰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조선말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곳. 조선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 어린 윤동주는 이곳에서 자랐다.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명동촌은 1900년대 초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만든 마을로, 3·1 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명동학교는 한글과 조선 역사를 가르쳤고, 교회는 민족정신의 구심점이었다."
북간도의 밤하늘은 달랐다. 서울이나 평양과 달리, 전기가 없었다.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었다. 밤이 되면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하늘은 밝았다. 별이 쏟아졌다. 윤동주는 밤마다 마당에 나가 하늘을 봤다. 은하수가 흘렀고, 별들이 반짝였다.
"동주야, 들어와서 자거라."
"엄마, 별이 너무 많아요."
"그래, 하늘에는 별이 많단다."
"저 별들은 뭐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거란다."
어린 윤동주에게 별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고, 무한한 세계에 대한 경외심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희망이었다. 그는 별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경험이 훗날 『별 헤는 밤』이 되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2. 명동학교 - 조선어로 배우는 조선의 역사
1925년, 윤동주 8세.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작았다. 교실은 세 개뿐이었고, 학생은 50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가르침은 컸다.
첫날, 선생님이 물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말을 쓰나요?"
"조선말이요!"
"맞습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조선말을 쓰고, 조선 글을 배우고, 조선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윤동주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명동학교는 한글로 수업했다. 일제가 조선에서는 일본어를 강요하던 시기, 명동학교는 한글로 가르쳤다. 국어 시간에는 한글을 배웠다. 역사 시간에는 단군, 고구려, 조선의 역사를 배웠다. 성경 시간에는 기독교 정신을 배웠다.
윤동주는 글을 사랑했다. 국어 시간이 가장 좋았다. 시를 읽고, 외우고, 따라 썼다. 선생님이 물었다.
"동주야, 장래 희망이 뭐니?"
"시인이요."
"왜 시인이 되고 싶니?"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시로 쓰고 싶어요."
그때 윤동주는 10살이었다.
3. 사촌 송몽규, 평생의 벗을 만나다
명동학교에는 윤동주와 같은 나이의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송몽규(宋夢奎). 윤동주의 외사촌이었다. 두 소년은 닮았다. 책을 좋아하고, 시를 쓰고, 조국을 그리워했다. 어느 날 방과 후, 두 소년은 강가에 앉아 이야기했다.
"몽규야,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독립운동가."
"어떻게?"
"공부해서 힘을 기르고, 조선을 되찾을 거야."
윤동주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시를 쓸 거야."
"시로 뭘 하게?"
"시로 조선을 기억하게 할 거야. 일본이 우리말을 빼앗아도, 시는 남으니까."
송몽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는 시를 쓰고, 나는 싸우자."
두 소년은 약속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조국을 위해 싸우기로. 이 약속은 1945년까지 이어졌다. 윤동주는 시로 저항했고, 송몽규는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둘 다 1945년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윤동주는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7일.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4. "왜 우리는 조선말을 못 쓰나요?" - 첫 번째 저항
1932년, 윤동주 15세.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었고, 북간도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명동학교에 일본 관리가 왔다.
"이제부터 이 학교도 일본어로 수업합니다." "안 됩니다!" "거부하면 학교를 폐쇄하겠습니다."
명동학교는 선택해야 했다. 일본어로 수업하거나, 폐교하거나. 결국 일본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거부했다.
일본어 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일본어 교과서를 펼치지 않았다. 일본어로 대답하라고 하면, 침묵했다.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었다. "윤동주, 일본어로 대답해라!"
윤동주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맞았다. 하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그날 밤, 윤동주는 일기에 썼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말을 쓴다. 일본이 나를 때려도, 나는 조선말을 버리지 않겠다."
15세 소년의 첫 저항이었다.
5. 평양, 서울, 그리고 조선어로 시를 쓰는 일
1935년,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북간도를 떠났다.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평양은 컸다. 전기가 있었고, 자동차가 다녔고, 극장이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충격을 받았다. 거리에서 조선말이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본어로 말했다. 상점 간판도 일본어였다. 신문도 일본어였다.
'이게... 조선인가?'
숭실중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그나마 조선어를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윤동주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6년, 『자화상』을 썼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19세 소년의 시였다.
1938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서울. 조선의 수도였지만, 이미 일본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그나마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곳이었다. 윤동주는 그곳에서 문학 동아리에 들어갔다. 정병욱, 강처중, 정진업 등과 함께 시를 쓰고, 낭독하고, 토론했다. 어느 날, 동아리 모임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우리가 지금 시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있는데."
"시로 뭘 할 수 있겠어. 총을 들어야지."
윤동주가 조용히 말했다.
"시는 기록입니다. 일본이 우리 땅을 빼앗아도, 우리말을 빼앗아도, 시는 남습니다. 우리가 조선인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의 눈빛은 확고했다.
6. 1941년, 졸업과 시집 출판의 꿈
1941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기념으로 자작시를 모았다. 19편의 시. 친구들과 함께 시집을 출판하려고 했다.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하지만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불온한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은 출판할 수 없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자연을 노래했다. 하지만 행간에는 저항이 숨어 있었다. 일본 검열관들은 알았다. 이 시가 위험하다는 것을. 윤동주는 시집을 출판하지 못했다. 대신 손으로 직접 베껴 써서 세 권을 만들었다. 한 권은 자신이 가지고, 한 권은 친구 정병욱에게 주고, 한 권은 동생 윤일주에게 줬다.
"혹시 내가 죽으면, 이걸 세상에 내줘."
24세 청년의 유언 같은 말이었다.
7. 일본 유학, 그리고 체포
1942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 릿쿄대학, 그리고 교토 도시샤대학. 왜 갔을까?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있었다. 윤동주는 학생 신분으로 징병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억압은 계속되었다.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다. 일본식 이름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윤동주는 거부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일기에 썼다.
"나는 내 이름을 잃었다. 하지만 내 시는 잃지 않았다."
1943년 7월 14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 독립운동, 민족주의 사상, 불온 문서 소지.
증거: 윤동주의 시, 송몽규의 독립운동 관련 서류.
시가 죄가 되었다. 조선어로 시를 쓴 것이 범죄가 되었다.
1943년 8월,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죄목: 치안유지법 위반. 형량: 징역 2년. 감옥은 지옥이었다. 좁은 독방, 굶주림, 혹독한 추위. 하루 한 끼의 밥과 단무지.
1945년 2월 16일 새벽.
윤동주는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27세. 사인: 불명. 실제로는 생체실험의 부작용. 송몽규도 3주 후인 3월 7일 같은 감옥에서 죽었다. 해방은 6개월 후에 왔다.
🌸 결론: 별을 본 소년이 별이 되다
윤동주의 어린 시절은 별로 시작되었다. 북간도의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 그 별을 세며 자란 소년. 그는 시를 썼다. 조선어로, 조선의 마음을 담아. 일본이 조선어를 금지해도, 창씨개명을 강요해도, 감옥에 가둬도, 그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북간도에서 별을 세던 소년은 27세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별이 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시집 한 권이 아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한 줄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윤동주는 부끄럽지 않았다. 별을 보며 살았고, 시로 저항했고, 죽는 순간까지 조선인이었다. 이것이 윤동주가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별빛이 만든 시인의 이야기다. 암흑의 시대에 별을 본 소년은, 시로 어둠을 밝혔고, 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저작
-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윤동주,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민음사, 1999
주요 사료 및 기록
- 정병욱, 『윤동주 평전』, 1948
- 윤일주(동생), 회고록 및 증언
- 연희전문학교 기록
- 후쿠오카 형무소 기록
참고 서적
-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
- 김응교, 『처럼: 윤동주의 시와 편지』, 꾸리에, 2014
- 오무라 마스오, 『윤동주 평전』, 푸른역사, 2017
- 이건청, 『윤동주 연구』, 문학세계사, 1995
- 정병욱, 『윤동주 전집』, 정음사, 1955
학술 논문
- 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한국학연구』
- 김응교, "윤동주 시의 기독교 정신", 『한국시학연구』
- 송우혜, "윤동주와 송몽규의 우정", 『현대문학』
- 이건청, "윤동주 시의 저항정신", 『문학과 비평』
관련 장소 및 기관
- 윤동주문학관 (서울 종로구 인왕산)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 명동촌 (중국 지린성)
- 후쿠오카 형무소 터 (일본)
다큐멘터리 및 영상
- KBS 다큐멘터리 『윤동주, 별을 사랑한 시인』
- MBC 스페셜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영화 『동주』 (2016, 이준익 감독)
참고 사이트
- 윤동주문학관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본 글은 윤동주의 시, 동생 윤일주와 친구 정병욱의 회고록, 관련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윤동주의 어린 시절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제한적이며, 당시 북간도 조선인 사회의 상황, 명동학교 기록, 그의 시와 편지를 종합하여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대화 내용 일부는 시대적 상황과 증언을 바탕으로 문학적으로 재구성했으나, 생체실험 피해, 형무소 순국 등 주요 사실은 역사적 기록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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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문학관(서울 인왕산)을 방문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어보세요
- 밤하늘의 별을 보며 윤동주를 생각해보세요
-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보세요
- 시로 저항한 청년의 용기를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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