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전설의 시작은 작고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정주영이 태어난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도 속 마을이다. 한반도가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던 시절,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훗날 '현대'라는 이름의 상징이 되고, 수출 1조 원 시대를 연다는 상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은 여덟 남매를 부양하기 벅찰 정도로 가난했다. 쌀은커녕 고구마조차 배불리 먹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며, 정주영은 어린 시절부터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보다 ‘살아남고 싶다’라는 본능에 가까운 현실 인식을 먼저 가졌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놓인 환경을 한탄하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손을 움직여 뭔가라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평생을 지배하는 핵심 사고방식이 된다.
어린 시절 정주영에게는 또래 친구들과 뛰노는 즐거움보다, 아버지의 심부름과 농사일을 돕는 일이 일상이었다. 특히, 그는 땔감을 지고 수 킬로를 걷거나, 겨울에는 눈 덮인 산을 넘어야 하는 생활 속에서 육체적인 고됨보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각을 점차 키워갔다. 정주영은 일찍부터 현실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힘이 남달랐다. 주변 어른들이 일제에 핍박받으며 살아가는 모습, 마을에 들어오는 외지인의 돈 자랑, 도시에서 들려오는 신문 이야기 등을 귀담아듣는 습관을 가졌고, 거기서 ‘다른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는 이 가능성을 붙잡기 위해, 남몰래 결심한다. 단 한 번이라도 도시로 나가보겠다는, 그것이 실패일지라도 도전해보겠다는 어린 소년의 다짐이었다.
첫 번째 탈출, ‘도망’이 만들어낸 전환점
정주영이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16세 때였다. 당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집안의 소를 몰래 팔아 그 돈으로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소 한 마리를 팔아 번 돈은 70원. 당시로서는 농가 한 해 수입과도 맞먹는 거액이었고, 그 선택은 단순한 가출이 아닌 가족의 질서를 파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 돈으로 도시로 향했고, 처음 도착한 곳에서 시작한 일은 인천의 미곡상 점원이었으며, 잠도 쪽방에서 쪼그려 자야 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그는 만족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첫 탈출은 결국 집안 어른들의 추적 끝에 다시 고향으로 끌려오면서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정주영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에는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다시 떠나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그는 총 여섯 번이나 집에서 탈출하고, 그 중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지막 일곱 번째 시도에서야 경성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 반복해서 시도하는 끈기,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으려는 강한 의지는 이미 십대 소년 시절부터 뚜렷했다. 정주영은 훗날 회고록에서 “도망을 잘 쳐야 성공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는데, 이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만든 현실의 벽을 부수기 위한 ‘행동의 철학’**이었다.
그는 미곡상 점원에서부터 시작해 잡역부, 건축 자재 운반, 쌀가게 운영 등 다양한 도시 노동을 거치며 사업의 감각을 키웠다. 그리고 이 시기의 공통점은 단 하나, 항상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았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그저 꿈만 꾸거나 상상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직접 해보고, 안 되면 바꾸고, 다시 해보는 과정을 통해 현실 감각과 실행력을 다져갔다. 많은 사람이 그를 ‘타고난 기업가’로 표현하지만, 사실 그의 능력은 반복적인 현실 실험과 몸으로 부딪친 경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현실에서 배운 경제관념과 인간관계의 원칙
정주영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시 생활을 통해 체득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경제적 가치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점원으로 일하던 쌀가게에서 단순히 물건을 나르는 일을 넘어서 고객이 어떤 쌀을 좋아하는지, 언제 수요가 몰리는지, 어떤 계절에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지를 관찰했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를 '일꾼'이 아니라 ‘관찰자’로 위치시켰고, 어떤 자리에서도 그냥 일만 하지 않았다. 항상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묻고 분석했다. 이 습관은 훗날 대기업을 운영하면서도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보고서를 보기 전에도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를 살폈던 그의 리더십으로 이어졌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는 특정 학벌이나 배경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잘하는 사람, 솔직한 사람,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까이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돈이 없던 자신에게 편견을 보이던 도시 상점 주인들, 고향에서 무시했던 친척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형성된 가치였다. 그는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라고 보았고, 오직 실력과 태도, 그리고 ‘믿을 수 있는가’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원칙은 현대건설 창업 이후에도 이어져, 능력이 있으면 누구든 중책을 맡겼고,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아들 교육에도 특별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학벌을 강요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현장을 직접 보고 배울 것을 강조했다. 한 번은 아들이 이론으로만 문제를 접근하자 "한번 현장에 가서 땅을 파봐라, 그러면 다 알게 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현장 중심의 철학을 고수했다. 정주영에게 삶은 교실이 아니라 거리였고, 책상이 아니라 삽과 망치 위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현대건설과 현대그룹, 그리고 ‘못 할 일은 없다’라는 철학
정주영이 현대건설을 세운 것은 1947년이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일본 자본에 의존하거나 정부와의 연결을 우선했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도시의 시스템, 사람들의 욕구, 시장의 흐름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는 흙탕 속에서도 시장이 있다는 것을 보았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는 작은 성공을 기반으로 스스로를 증명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경영철학, "하면 된다", "못할 일은 없다"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신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본 그였기에, 그는 실패를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 진출 등 모두가 말리는 일에 먼저 도전했고, 그 도전은 결국 현대그룹을 아시아 최대 건설·중공업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정주영은 언제나 현실을 분석하고, 행동으로 옮겼고, 그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었다. 어린 시절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발판 삼아 불가능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는 단순히 한 명의 사업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성장 과정과도 겹치는 이야기이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너지지 않는 사람, 박세리의 어린 시절을 아는가 (0) | 2025.11.29 |
|---|---|
| 비운의 출생에서 명군으로, 영조의 삶에 담긴 굴곡과 통찰 (0) | 2025.11.27 |
| 비운의 소년 김춘추, 선덕여왕·김유신과 함께 만든 삼국통일의 서막 (1) | 2025.11.26 |
|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 덕만공주의 어린 시절과 왕위 계승의 비밀 (0) | 2025.11.26 |
| 신라의 명장 김유신, 조용한 소년이 위인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 (0) | 2025.11.25 |
| 연개소문의 성장 배경 완전 해부: 권력을 만든 어린 시절의 비밀 (0) | 2025.11.25 |
| 광개토대왕, 대륙을 품은 어린 왕자의 성장기 (0) | 2025.11.24 |
| 고구려 온달, 웃음 속에 숨겨진 장군의 어린 시절 (1) | 2025.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