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그것이 그의 출발선이었다
양학선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체조 역사에 남은 단 하나의 금빛 순간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시작은 너무나 평범했고, 때로는 서글펐다. 초등학생이던 시절, 그는 우유 급식이 나와도 신청하지 못했다. 단지 형편이 안 돼서였다. 급식비를 내기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운동을 시작하기에도, 신체 조건을 맞추기에도, 유니폼을 입기에도 빠듯한 현실 속에 있었다. 양학선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체조 천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밀어주지도 않았고, 금수저 집안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자란 곳, 경기 포천의 작은 마을에서 나무를 타고, 펜스를 넘고, 땅에 손을 짚고 뛰면서 자기 몸을 익혔다. 학교 체육 선생님이 “너 점프는 잘하더라”라고 한 한마디가 전부였다.
많은 사람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생각할 때 고난을 예상하지만, 양학선의 경우엔 ‘시작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에게 체조는 선택이 아니었다. 체육 선생님의 권유와 학교의 추천이 없었다면, 그는 체조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체조장이 따로 없던 시절, 그는 매트를 벽돌로 눌러 고정해 놓고, 학교 강당에서 구르기를 반복했다. 체조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었고, 장비도 없었지만, 그는 재능 이전에 반복을 멈추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 습관이 후에 그를 세계 정상의 무대로 이끈다.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도, 그는 계속 뛰었다
양학선의 부모님은 성실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며 네 남매를 키웠다. 양학선은 그중 셋째였고, 유독 몸을 많이 움직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운동을 전문적으로 시키기엔 여유가 없었다. 훈련에 필요한 체조복 하나, 보호장비 하나가 부담스러웠던 시절. 체조는 단순한 체력으로만 되는 종목이 아니다. 반복과 장비, 시설, 코치, 안전 등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운동이다. 그런데 양학선은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채 시작했다. 연습 장비가 닳아 구멍이 나도 그냥 썼고, 손에 물집이 생겨도 그대로 연습했다.
중학교 시절, 양학선은 경기체육중학교로 진학한다. 이곳에서도 그는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의 눈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구르고, 누구보다 빨리 회전했다.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도, 그에게는 ‘속도’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 있었다. 체조는 공중에서 몸을 던지는 종목이다. 공포심을 이겨야 하고, 반복에 대한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양학선은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춘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마침내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본격적인 국가대표 후보군에 들며 진천선수촌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유망주처럼 순탄하게 성장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부상, 체력 저하, 환경 변화. 하지만 양학선은 조용히, 흔들림 없이 훈련했다. 그에게는 **“선수촌에 남아 있기 위해 훈련을 멈출 수 없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는 항상 “내일도 불러줄까?”라는 불안 속에서 운동했고, 그런 절박함이 그의 기술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양학선 기술, 이름을 남긴다는 것의 무게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도마 결승전. 당시 양학선은 결승에 오른 선수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세계적인 도마 강자들이 즐비한 그 무대에서, 양학선은 한국 체조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다. 단 한 번의 착지로 세계를 뒤흔든 순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 ‘양학선(Yang Hak Seon)’을 성공시키며 세계 정상에 섰다. 그 기술은 난이도 7.4의 최고 난도 기술이었고, 그의 이름이 기술 코드로 정식 등록되었다. 이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체조 역사에, 그리고 세계 체조 규정에 자기 이름을 남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성과 뒤에는 감춰진 고통도 있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양학선은 체조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언론은 그를 집중 조명했고, 광고도 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외부의 변화가 그를 흔들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가, 다시 점프를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된 착지, 하강, 훈련은 몸을 망가뜨렸다. 그는 결국 심각한 부상으로 수술받게 된다. 이 시점부터 양학선의 커리어는 꺾이기 시작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후배들이 앞서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시합을 뛰지 못한 날들이 길어졌다.
그러나 양학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재활을 시작했고, 훈련을 되살렸다. “내가 만든 기술을 다른 선수가 더 잘 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가 가진 자존심은 단지 금메달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무게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길 위에 계속 서 있고 싶었다. 어떤 선수는 성취를 끝으로 은퇴를 택하지만, 양학선은 그 성취 위에 더 많은 도전을 올리고 싶어 했다.

무대 밖에서도 그는 조용히 날아오른다
양학선은 화려한 말을 하지 않는다. 수상 소감에서도, 인터뷰에서도 짧은 말, 진심 어린 말만 했다.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국가대표라는 책임감으로 뛰었습니다." 같은 말들. 그는 항상 진지했고, 늘 겸손했다. 그를 아는 체조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학선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이는 그의 경력 전반에 드러나는 태도다. 조용히, 묵묵히, 매일 연습장으로 들어가는 선수.
그는 후배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리더다. 기량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다. 부상으로 1년 넘게 쉬는 동안에도 양학선은 후배들의 기술을 봐주고, 조언을 해주고, 시합장에서도 응원석에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본인의 시합이 아니더라도, 그는 늘 체조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후배들이 “양학선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게 만들었다.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국가대표였다. 수많은 부상, 고통, 부담을 이겨낸 뒤에도 그는 아직도 기술을 갈고 닦고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왜 아직도 체조를 하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아직 끝이 아닌 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에서, 양학선이라는 사람의 본질이 드러난다. 끝까지 자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 그것이 양학선이다.
마무리하며 : 양학선이라는 한 사람의 무게
양학선은 단지 점프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다. 그는 땅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던져 하늘을 향한 사람이다. 그가 보여준 비상은 체조장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어릴 때는 우유 한 잔을 얻기 위해 참고, 청춘 시절에는 부상을 이겨내기 위해 참고, 성인이 된 후에는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 참아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날아오르는 순간보다 착지하는 순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양학선은 여전히 체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날아오를 때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무게와 인생을 함께 본다. 높이 날 수 있는 건 땅에서 단단히 디뎠기 때문이라는 걸, 양학선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열악한 환경이, 반복된 부상이 그를 꺾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양학선은 그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 체조 후배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진정한 금메달은 그가 만든 기술이 아니라, 그가 만든 사람의 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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