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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손기정의 어린 시절, "조선인은 못 이긴다"는 말을 이기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민족 영웅이 되다

by onary 2026. 1. 11.

1920년경, 8세 소년 손기정. 평양의 작은 집에서 자랐고, 집안은 가난했으며,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일제강점기였고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무시당했으며, 어린 손기정은 "조선 사람은 안 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것은 평양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달리기로 한을 풀고,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섰지만 마음속으로는 태극기를 품었던 민족 영웅의 이야기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평양의 가난한 동네 흙길에서 12-14세 손기정이 맨발로 달리고 있다. 가난해서 신발도 없이 낡은 한복을 입고 있으며, 발바닥에는 매일 달리기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못 이긴다"는 무시를 받으며 자랐지만, 달릴 때만큼은 자유로웠고 이것이 훗날 세계 최고 마라토너가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936년 24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지만 일본 대표로 일장기를 달아야 했고,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평양 가난한 소년이 맨발로 달리며 키운 실력으로 민족의 영웅이 된 손기정의 어린 시절
손기정 어린 시절 - 평양 흙길을 맨발로 달리는 12세 소년

 

1. "왜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났을까" - 8세, 일제강점기의 가난

1920년경, 손기정 8세. 평양에서 자랐고,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 손영환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고 어머니는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며 돈을 벌었으며, 손기정은 형제들과 함께 좁은 방에서 살았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고, 겨울에는 추워서 잠을 못 자는 날도 있었으며, 손기정은 "왜 우리는 이렇게 가난할까"라고 생각했다. 더 괴로운 것은 일본인들의 무시였다.  일제강점기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조선 사람들은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거리에서 일본인을 만나면 비켜줘야 했고, 일본인 아이들이 조선인 아이들을 때려도 항의할 수 없었으며, 손기정은 그럴 때마다 주먹을 쥐었다.  신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때, 손기정은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일본어로만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조선 역사 대신 일본 역사를 배워야 했다.

일본인 선생님은 "너희는 일본 천황의 신민이다"라고 가르쳤고, 조선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야 했다. 쉬는 시간,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말했다.

"야, 조선인들! 너희는 우리보다 못해."

손기정은 분했지만 참았다. '싸우면 안 돼. 조선인이 일본인을 때리면 큰일 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기정은 달렸다. 학교에서 집까지 약 3킬로미터였고, 다른 아이들은 천천히 걸어갔지만 손기정은 뛰었다.

달리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렸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면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으며,

'달릴 때만큼은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해'라고 생각했다.

날마다 뛰었고, 비가 와도 뛰었으며, 눈이 와도 뛰었다.  신발도 제대로 없어서 맨발로 뛸 때가 많았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였지만 손기정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달리기가 좋아. 달릴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

8세 소년은 아직 몰랐다. 자신이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가 될 것이라는 것을.

 

 

2. 10대, "나는 달리기로 승부하겠다" - 학교 시절과 마라톤의 시작

1925년경, 손기정 13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중등학교에 가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손기정의 성적이 좋았고 장학금을 받아 갈 수 있었다. 양정고보는 평양 최고의 학교 중 하나였고, 손기정은 운이 좋았다. 학교에는 운동장이 있었고, 체육 수업이 있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운동장을 달리게 했고, 손기정은 늘 1등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헉헉거릴 때 손기정은 여유가 있었고, 선생님이 놀라워했다.

"손기정, 너는 달리기 재능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선생님."

"육상부에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니?"

손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상부? 그게 뭐지? 하지만 달리는 거라면 좋아.'

육상부에 들어갔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코치가 손기정을 보고 말했다.

"너는 단거리보다 장거리에 맞는 것 같다. 마라톤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마라톤이 뭔가요?"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거야. 아주 긴 거리지." 손기정은 놀랐다. '42킬로미터? 그렇게 긴 거리를?'

하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니까. 긴 거리도 할 수 있을 거야.'

첫 마라톤 훈련은 고통스러웠다. 10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고, 20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니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기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인이다. 일본인들에게 지지 않겠다.' 날마다 훈련했고, 새벽에 일어나 달렸으며, 방과 후에도 달렸다. 신발이 닳아 구멍이 났고, 발에 물집이 잡혔지만 계속 뛰었다.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달리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1929년경, 손기정 17세. 첫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평양에서 열린 지역 대회였고, 손기정은 긴장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출발 신호가 울렸고, 손기정은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렸고, 중반부터 속도를 냈으며, 후반에는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손기정은 1등이었다. 코치가 달려와 어깨를 두드렸다.

"손기정! 네가 우승했다!" 손기정은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고, 자부심의 눈물이었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의 눈물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조선인이지만, 달리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17세 청년의 결심이었다.

 

3. 20대 초반, "일본 대표로 뛰어야 하는 슬픔" - 실력 인정과 베를린행

1932년경, 손기정 20세. 마라톤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 내 대회에서 계속 우승했고,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으며, 사람들이 손기정을 주목했다. "평양의 마라톤 천재", "조선의 희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했다. 손기정은 조선인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일본 제국 신민"이었다.  국제 대회에 나가면 일장기를 달아야 했고, 일본 국가를 불러야 했으며, 이름도 일본식으로 "손 키테이(ソン・キテイ)"라고 불렸다.

1935년, 손기정 23세. 동아마라톤에서 우승했다. 2시간 26분 42초의 기록이었고,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손기정이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조선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손기정은 복잡했다.

'올림픽에 나가면...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한다. 조선 대표가 아니라 일본 대표로.'

밤에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가서 이겨야 한다. 조선인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은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았고, 마음은 아팠지만 달릴 준비를 했다.

'나는 조선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려야 한다.'

42.195킬로미터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손기정은 앞서갔고, 뒤처졌고, 다시 앞섰다.  30킬로미터를 지나며 선두로 올라섰고, 마지막 10킬로미터를 전력으로 달렸으며,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했다.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세계가 놀랐다. "일본의 손 키테이가 금메달!" 하지만 손기정은 알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나는 조선인이다.'

시상대에 올랐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일본 국가가 울려 퍼졌으며, 일장기가 올라갔다.  손기정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렀고,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 화분으로 가렸다. 사진기자들이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이 조선에 전해졌다.  동아일보가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고(일장기 말소 사건),  일본 당국이 동아일보를 폐간시켰으며,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4. 해방 후, "이제는 태극기를 달고 뛰게 하고 싶다" - 마라톤 지도자

1945년, 손기정 33세.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항복했고, 조선은 자유를 되찾았으며, 손기정은 울었다.

'드디어... 이제 일장기를 달지 않아도 된다.'

선수 생활은 끝났지만, 손기정은 마라톤을 떠나지 않았다.

후배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너희는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다"며 격려했으며, 한국 마라톤의 기초를 닦았다.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베를린 올림픽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손기정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기뻤지만 슬펐다. 금메달은 땄지만, 가슴에 일장기를 달아야 했으니까."

"선생님은 진정한 영웅이세요."

"아니다. 나는 그냥 달렸을 뿐이야. 하지만 너희는 다르다. 너희는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어. 자랑스럽게 뛰어라."

1988년, 손기정 76세.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에서 열리는 첫 올림픽이었고, 손기정은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주자로 섰다.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트랙에 들어섰을 때, 8만 관중이 기립박수를 쳤다. 손기정은 울었다. 52년 전 베를린에서 일장기를 달고 달렸던 그 청년이, 이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서울 올림픽 성화를 들고 있었다.

'조선은 이제 자유롭다. 우리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달고 당당히 세계와 겨룬다.'

2002년, 손기정 90세. 생을 마감했다. 평생을 마라톤과 함께 산 삶이었고, 민족의 영웅으로 살다 간 삶이었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손기정이 가르친 제자들, 손기정을 존경하는 마라토너들, 손기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었다. 손기정의 관에는 태극기가 덮였다. 1936년 베를린에서 달지 못했던 태극기였고, 이제야 당당히 덮을 수 있는 태극기였다.

 

🌸 결론: 달리기로 한을 풀고 민족의 자긍심을 세운 영웅

손기정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일제의 억압 속에서 자랐다. 8세에 일본인의 무시를 받으며 "조선인은 못 이긴다"는 말을 들었고, 13세에 달리기로 한을 풀기 시작했으며, 17세에 첫 마라톤 우승을 했다.

"조선인은 안 돼." 8세 소년이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손기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달리기로 분을 풀었고, 날마다 맨발로 뛰며 실력을 키웠으며, 20세에 마라톤 선수로 이름을 알렸고,  24세에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을 땄으며,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이 남긴 것은 금메달만이 아니었다.

"조선인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가난해도 꿈을 포기하지 마라."

"달리기는 자유다."

"일장기를 달았지만 마음속에는 태극기가 있었다."

이것이 손기정이 보여준 삶이었다. 평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의 억압 속에서 자랐지만, 달리기로 세계 정상에 올랐고,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하는 슬픔을 겪었지만 민족의 자긍심을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후배들에게 태극기를 달고 뛰게 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맨발로 뛰던 평양 소년에서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 숙인 민족 영웅으로.

"조선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증명한 손기정으로. 이것이 손기정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달리기가 만든 민족 영웅의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전기

  • 손기정기념재단, 손기정 평전, 2012
  • 대한체육회, 한국 체육 100년사, 2020

참고 서적

  • 이학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살림, 2005
  •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손기정의 생애와 업적, 2002

학술 논문

  • 김동선,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 사건", 한국체육사학회지
  • 박성봉,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손기정", 체육사학회지
  • 하남길, "손기정의 생애와 한국 마라톤", 한국체육학회지

관련 기관

  • 손기정기념관
  • 대한체육회
  • 대한육상연맹

※ 본 글은 손기정 관련 전기,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1912년 평양 출생, 1929년 첫 마라톤 우승, 1935년 동아마라톤 우승,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일장기 말소 사건,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2002년 사망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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