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도 글을 배우고 싶어요." 1915년경, 7세 소년 윤봉길이 말했다. 충남 예산 덕산의 작은 농가에서 자랐고, 집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논밭을 일궜지만 땅이 적어서 먹고살기 힘들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왔으며, 윤봉길은 맏아들로서 일찍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소년은 글을 배우고 싶었다. 이것은 충남 예산 가난한 농가의 소년이 글을 배워 나라를 구하겠다는 꿈을 키웠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25세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의 이야기다.

1. "나도 글을 배우고 싶다" - 7세, 가난하지만 배우고 싶은 소년
1915년경, 윤봉길 7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자랐고, 집은 작은 초가집이었다. 논밭이 조금 있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고, 아버지는 남의 땅도 빌려 농사를 지었으며, 윤봉길은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도왔다. 일제강점기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마을 어른들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백성이 무슨 소용이냐."
하지만 윤봉길의 아버지는 달랐다.
"봉길아, 나라는 빼앗겼지만 우리 마음까지 빼앗긴 건 아니란다."
마을 서당을 지나가다가 윤봉길은 멈춰 섰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한문을 읽는 소리가 들렸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윤봉길은 귀를 기울였다. '저 소리가 뭘까? 무슨 뜻일까?'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뭘 배워요?"
"천자문이란다. 한자를 배우는 거지."
"저도 배우고 싶어요."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봉길아, 서당은 돈이 드는단다. 우리 형편으로는..."
윤봉길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아버지가 가르쳐주세요. 아버지는 글을 아시잖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결심했다.
"그래, 내가 가르쳐주마. 대신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날부터 윤봉길은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낮에는 농사일을 도왔고, 저녁이면 호롱불 아래 앉아 천자문을 배웠다.
종이가 없어서 땅바닥에 막대기로 글자를 썼고, 한 글자 한 글자 외웠으며, 잠들기 전까지 복습했다.
아버지는 놀랐다. '이 아이는 정말 똑똑하구나.'
며칠이면 배울 걸 하루 만에 외웠고, 가르쳐준 것 이상으로 질문했으며, 글 읽기에 빠져들었다. 이웃 어른이 물었다.
"윤 서방, 봉길이가 글을 잘 배운다며?"
"그렇습니다. 하늘이 내린 재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서당에 보내야지."
"형편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 서당 훈장이 찾아왔다.
"윤 서방, 봉길이를 우리 서당에 보내시오. 돈은 걱정 마시오."
2. 10대, "조선은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나" - 서당 시절과 독립 의지
1918년경, 윤봉길 10세.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훈장이 학비를 면제해 줬고, 윤봉길은 열심히 공부했다. 천자문을 마치고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동료 학생들보다 빨리 배웠다. 하지만 윤봉길은 한문 공부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훈장님, 조선은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나요?"
훈장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우리가... 약했기 때문이란다."
"약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힘이 없었다는 뜻이지. 백성이 가난했고, 나라가 부강하지 못했고, 배운 사람이 적었단다."
윤봉길은 주먹을 쥐었다.
"그럼 우리가 강해지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나요?"
훈장은 윤봉길의 눈을 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단다. 우리가 강해지면... 언젠가는."
10세 소년은 그날 결심했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1919년, 윤봉길 11세. 3.1 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고, 예산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며, 윤봉길도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일본 경찰이 달려왔고, 사람들을 때렸으며, 윤봉길도 쫓겨났다. 11세 소년은 도망치면서 생각했다.
'일본은 나쁜 놈들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를 때린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커서 독립운동을 할 거예요."
아버지는 놀라면서도 자랑스러웠다.
"봉길아, 그건 위험한 일이란다."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11세 소년의 결심이었다.
3. 10대 후반, "농민을 깨우치자" - 야학과 농촌 계몽
1923년경, 윤봉길 15세. 서당 공부를 마치고 오치서숙(吾致書塾)이라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문뿐만 아니라 역사와 지리를 배웠고,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윤봉길은 학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야학을 열었고,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으며, "글을 알아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야학 첫날, 윤봉길은 농민들 앞에 섰다. 40-50대 어른들이 15세 소년을 보며 웃었다.
"야, 꼬마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윤봉길은 당당히 대답했다.
"어르신들, 나이는 어리지만 제가 아는 걸 가르쳐드리고 싶습니다. 글을 알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글을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신문을 읽을 수 있고, 계약서를 쓸 수 있고, 일본 사람들에게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년의 말이 맞는구나.'
야학에서 윤봉길은 한글뿐만 아니라 역사도 가르쳤다.
"우리 조선은 5천 년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우리 조상들은 강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에게 빼앗겼나?"
윤봉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단결하지 못했고, 백성이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깨어나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15세 소년의 말에 감동받았다. '이 아이는... 보통이 아니구나.'
4. 20대 초반, "중국으로 가야 한다" - 망명과 독립군
1930년, 윤봉길 22세.
결혼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윤봉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렇게 농사만 지으며 살 수는 없다. 나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가족들이 말렸다.
"봉길아, 이제 가정이 있잖아. 아들도 있고."
윤봉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습니다. 나라를 되찾아야 우리 아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1930년 3월, 윤봉길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압록강을 건넜으며,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오겠다"는 편지만 남겼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김구 선생을 만났으며,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윤봉길은 김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를 써주십시오. 저는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을 보며 물었다.
"자네 나이가 몇인가?"
"스물두 살입니다."
"아직 젊은데... 고향에 가족도 있을 텐데..."
윤봉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족보다 나라가 먼저입니다. 제가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손을 잡았다. '이 청년은... 진짜구나.'
5. 1932년 4월 29일, "이 한 몸 조국을 위하여" -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 천황 생일 기념식이 열렸다. 일본 고관들이 모였고, 시라카와 대장과 시게미쓰 공사가 참석했으며, 일본인들이 축하 행사를 했다. 윤봉길은 물통 모양의 폭탄을 들고 공원에 들어갔다. 가슴이 뛰었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나는 오늘 죽는다. 하지만 조국은 산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윤봉길은 기다렸다. 단상에 일본 고관들이 앉았다. 윤봉길은 폭탄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올렸다. 충남 예산의 작은 집, 아버지의 얼굴, 아내와 아들, 글을 가르치던 농민들, 야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청년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가야 합니다.' 윤봉길은 폭탄을 던졌다.
폭발. 시라카와 대장이 죽었고, 여러 일본 고관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윤봉길은 즉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이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느냐?"
윤봉길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조선은 너희 것이 아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 사형이 집행되었다. 윤봉길은 25세였다. 마지막 말을 남겼다.
"대한독립 만세."
윤봉길은 숨을 거뒀다. 25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다.
🌸 결론: 글을 배워 나라를 구하겠다던 소년이 25세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윤봉길의 어린 시절은 배움의 열정으로 채워졌다. 7세에 글을 배우고 싶어 했고, 10세에 서당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으며, 11세에 3.1 운동을 보며 독립을 결심했고, 15세에 야학을 열어 농민을 가르쳤다.
"나도 글을 배우고 싶어요."
7세 소년이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윤봉길은 배웠다. 글을 배워 나라의 역사를 알았고, 농민을 가르치며 민족을 깨웠으며, 22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고, 25세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져 순국했다.
윤봉길이 남긴 것은 폭탄만이 아니었다.
"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다. 백성이 깨어나야 나라를 되찾는다. 이 한 몸 바쳐 조국을 구하겠다. 대한독립 만세."
이것이 윤봉길이 보여준 삶이었다.
충남 예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글을 배우고 싶어 했던 소년이, 농민을 가르치며 민족을 깨웠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25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글 배우기를 갈망하던 7세 소년에서 훙커우 공원 의거의 영웅으로. 야학에서 농민을 가르치던 15세 청년에서 25세에 순국한 의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로. 이것이 윤봉길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배움이 만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전기
- 김구, 백범일지, 돌베개, 1997
- 윤주, 윤봉길 의사 일대기, 매봉재단, 2005
참고 서적
-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사 자료집, 2012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윤봉길, 2008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 윤봉길, 2015
학술 논문
- 한시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김광재, "훙커우 공원 의거의 역사적 의의", 한국근현대사연구
- 조동걸, "윤봉길 의사와 한인애국단", 독립운동사연구
관련 기관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 독립기념관
- 국가보훈처
역사 기록
- 한인애국단 관련 자료
- 상하이 임시정부 기록
- 일본 재판 기록
※ 본 글은 윤봉길 의사 관련 전기, 백범일지,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1908년 충남 예산 출생, 1919년 3.1 운동 참여, 1923년 야학 활동, 1930년 중국 망명,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12월 19일 순국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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