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는 공부하고 싶어요." 1955년경, 7세 소년 전태일이 말했다.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어머니는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도왔다. 전태일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책을 살 돈이 없었고, 공책도 연필도 제대로 없었으며, 다른 아이들이 새 책가방을 메고 다닐 때 전태일은 형이 쓰던 낡은 가방을 메었다.
이것은 대구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공부의 꿈을 포기하고 13세에 노동자가 되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청년의 이야기다.

1. "왜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 7세, 배고픔과 공부의 꿈
1955년경, 전태일 7세. 대구에서 자랐고, 집은 좁은 단칸방이었다. 아버지 전상수는 날품팔이로 일했고 일감이 없는 날이 많았으며, 어머니 이소선은 남의 집 빨래를 해주고 품삯을 받았다. 가족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고, 전태일은 배고픔이 무엇인지 어릴 때부터 알았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학용품을 살 돈이 없었고, 점심도 못 싸 가서 친구들이 도시락을 먹을 때 전태일은 운동장에 나가 있었으며, "너는 왜 밥을 안 먹니?"라는 질문에 "안 먹어도 안 배고파"라고 거짓말했다.
집에 돌아오면 동생들이 울고 있었다.
"엄마, 배고파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밀가루 반죽으로 수제비를 끓였다. 건더기는 거의 없고 국물만 많은 수제비였고, 전태일은 동생들에게 더 먹이려고 자신은 조금만 먹었다. 밤에 이불속에서 전태일은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다른 아이들은 배불리 먹고 학교도 잘 다니는데...'
하지만 울지 않았다. '내가 울면 엄마가 더 슬퍼하실 거야.' 7세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2. 10세, "공부하고 싶어요" - 학교와 노동 사이
1958년경, 전태일 10세.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을 해야 했다. 방과 후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주말에는 구두닦이를 했으며, 어떤 때는 시장에서 짐을 날랐다. 10세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전태일은 돈을 벌어야 했다. 하루는 신문 배달을 마치고 학교에 갔는데 지각이었다. 선생님이 꾸짖었다.
"전태일! 또 지각이야? 왜 시간을 못 지키니?"
전태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문 배달을 했다고 하면 무시당할 것 같아.'
그래도 전태일은 공부를 좋아했다. 특히 산수와 국어를 좋아했고,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집에는 책이 없었고, 도서관에 갈 시간도 없었으며, 친구들에게 빌려 읽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물었다.
"전태일,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전태일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공부? 그래, 좋은 꿈이구나."
하지만 전태일은 알고 있었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중학교는 못 갈 거야.'
3. 13세, "학교를 그만둬야 해" - 초등학교 중퇴와 노동의 시작
1961년, 전태일 13세.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전태일을 불렀다.
"태일아... 미안하다. 엄마가 너를 더 이상 학교에 보낼 수가 없구나."
전태일은 알고 있었다. 이 날이 올 줄. 하지만 막상 들으니 눈물이 났다.
"엄마... 저 학교 다니고 싶어요."
"엄마도 알아. 하지만... 동생들이 굶고 있어.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한단다."
전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맏이니까. 내가 동생들을 책임져야지.'
13세 소년이 학교를 그만뒀다. 처음 일한 곳은 합판 공장이었다. 하루 12시간 노동. 먼지가 가득한 공장에서 나무를 자르고 운반했고, 손에 가시가 박히고 등에 땀이 흘렀지만 쉴 수 없었다. 월급은 고작 몇천 원이었고, 그것도 제때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밤에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아팠다. 13세 소년의 몸은 12시간 노동을 견디기 힘들었고, 손은 물집으로 가득했으며, 허리는 휘청거렸다.
하지만 전태일은 참았다. '이 돈으로 동생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
4. 10대 후반, "왜 우리는 이렇게 일해야 하나" - 평화시장 재단사
1965년경, 전태일 17세. 서울로 올라왔다.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평화시장의 피복 공장에 재단사 보조로 들어갔다.
청계천 평화시장은 서울 최대의 의류 제조 단지였고, 수많은 봉제 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공장은 다락방이었다.
천장이 낮아서 허리를 펴고 설 수 없었고, 창문도 없어서 환기가 안 되었으며, 재단기 소리와 재봉틀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그곳에서 전태일은 충격을 받았다. 노동자 대부분이 10대 소녀들이었다. 14세, 15세, 16세. 아직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고, 어떤 아이들은 전태일보다 어렸다. 하루 15시간 노동.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고, 밥 먹을 시간도 제대로 없었으며,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봐야 했다. 월급은 턱없이 적었다. 한 달 내내 일해도 몇천 원이었고, 어떤 아이들은 밥값도 안 나왔다. 어느 날, 옆에서 일하던 소녀가 쓰러졌다. 14세 소녀였고, 폐결핵 증상이 있었다.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오래 일한 탓이었고, 영양실조도 겹쳤다. 전태일이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이 아이 병원에 보내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일 못 하면 나가라고 해."
전태일은 분노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구나.'
그날 전태일은 결심했다. '이건 잘못됐어. 이렇게 일하면 안 돼.'
5. 20대 초반, "법이 있다면서요?" - 근로기준법과의 만남
1968년경, 전태일 20세. 재단사로 일하면서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낮에는 15시간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가서 공부했다. 잠은 하루 4시간도 못 잤지만, 전태일은 배우고 싶었다. 야학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입니다."
전태일은 놀랐다. '법이 있다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 하루 8시간 노동
- 주 48시간 제한
- 18세 미만 야간 노동 금지
- 최저임금 보장
- 휴일과 휴가 보장
전태일은 충격을 받았다.
'평화시장은 이 법을 하나도 안 지키고 있어!'
하루 15시간 노동, 14세 소녀들의 야간 노동, 최저임금도 안 되는 월급, 휴일도 없는 노동.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사장에게 갔다.
"사장님, 우리는 이 법대로 일해야 합니다."
사장은 웃었다.
"그게 뭔데? 그런 거 지키면 장사 못 해."
전태일은 깨달았다. '법은 있지만, 지키지 않는구나.'
6. 22세, "우리도 사람입니다" - 1970년 11월 13일
1970년, 전태일 22세.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했고, 노동 시간을 줄여달라고 호소했으며, 어린 소녀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사장들은 무시했고, 정부는 방관했으며, 언론도 관심 없었다. 전태일은 절망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들어줄까?'
고민하고 고민했다. 강력하게 호소할 방법이 필요했다. 적당히 외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태일은 결심했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노동자의 인권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1970년 11월 13일 금요일. 평화시장 앞.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서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불을 붙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22세 청년이 불길 속에서 외쳤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몸의 90%가 화상을 입었고, 어머니가 손을 잡았다.
"태일아... 왜 이랬니..."
전태일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머니... 내가 못다 한 일... 어머니가 해주세요... 내 친구들을... 잘 부탁합니다..."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 전태일은 2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7. 이후, "전태일은 죽지 않았다" - 어머니 이소선과 노동자들
전태일이 죽은 후,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뜻을 이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우리 태일이가 원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이 조금씩 지켜지기 시작했고, 어린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것을 일깨웠고, 노동자의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렸으며, 법이 있으면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 결론: 공부하고 싶었던 소년이 노동자의 존엄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배고픔으로 채워졌다. 7세에 학용품도 없이 학교에 다녔고, 10세에 신문 배달과 구두닦이를 했으며,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공부하고 싶어요."
13세 소년이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전태일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13세에 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17세에 평화시장 재단사가 되었으며, 20세에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배웠고, 22세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해 생을 마감했다. 전태일이 남긴 것은 희생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어린 소녀들을 혹사하면 안 된다."
"법이 있으면 지켜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전태일이 보여준 삶이었다. 대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자가 되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린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노동자의 인권과 존엄성을 외친 청년이 되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공부하고 싶었던 13세 소년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희생한 22세 청년으로.
"우리도 사람입니다"를 외친 전태일로.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노동자의 존엄을 지킨 청년으로.
이것이 전태일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가난이 만든 노동자 인권의 상징이 된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전기
-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83
- 이소선, 내 아들 전태일, 돌베개, 2001
참고 서적
-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의 생애와 정신, 2015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 노동운동사, 2010
학술 논문
- 김금수, "전태일과 노동자 인권", 노동사회연구
- 박태주, "1970년대 노동 환경과 근로기준법", 한국사회학
- 이병천, "전태일의 생애와 노동 존엄성", 역사비평
관련 기관
- 전태일기념관
- 전태일재단
- 근로기준법 연구소
다큐멘터리
- KBS 다큐멘터리 '전태일' (2005)
- EBS 다큐프라임 '전태일, 22년의 생애' (2010)
※ 본 글은 전태일 관련 전기, 어머니 이소선의 회고록,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1948년 대구 출생, 1961년 초등학교 중퇴, 1965년 평화시장 입사, 1968년 근로기준법 공부, 1970년 11월 13일 분신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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