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박항서! 박항서!" 2018년, 베트남 하노이 거리가 떠들썩했다.
베트남 국가대표팀이 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 올랐고, 그 중심에 한국인 감독 박항서가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고, 박항서 감독의 사진이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춤을 췄으며, "마술사 박항서"라고 외쳤는데, 이 순간 박항서는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국인이 되었다.
하지만 60년 전으로 돌아가면, 이 사람은 충남 서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축구로 밥 먹고 살 수 있겠냐"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공도 제대로 없어서 헝겊공으로 축구를 배웠으며,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라"는 부모님의 걱정을 들으며 살았던 소년이었다.
이것은 충남 서산 가난한 집안의 축구 소년이, "축구는 밥벌이가 안 된다"는 말을 이기고, 베트남 국민 영웅이 된 이야기다.

1. "공이 없어서 헝겊공으로 찼다" - 7세, 축구와의 첫 만남
1966년경, 박항서 7세.
충남 서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박항서는 여섯 남매 중 하나였는데,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살림을 꾸렸으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끼니를 거르는 날도 많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감을 가질 수 없었고, 새 옷을 입는 것도 명절 때나 가능했으며, 학용품조차 형이 쓰던 것을 물려받아야 했다.
하지만 박항서에게는 축구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함께 빈터에서 공을 차며 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문제는 제대로 된 축구공이 없었다는 것인데, 가죽 축구공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고, 그래서 아이들은 헝겊을 모아서 둥글게 말아 끈으로 묶은 "헝겊공"을 만들어 찼다. 어느 날, 동네 형이 물었다.
"항서야, 너 축구 정말 좋아하는구나?"
"네, 형! 축구가 제일 재미있어요."
"그래? 근데 축구로 밥 먹고 살 수는 없잖아. 공부 열심히 해야지."
박항서는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나는... 축구가 너무 좋은데...'
8세가 되던 해, 학교에 입학했는데, 체육 시간이 가장 기다려졌다.
비록 학교 운동장도 흙바닥이었고 축구공도 낡아서 바람이 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헝겊공보다는 나았고, 체육 선생님이 공을 가져오면 아이들이 환호하며 달려들었다.
박항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공을 잘 다뤘는데, 헝겊공으로 매일 연습했기 때문에 발재간이 좋았고, 어떤 공이든 잘 컨트롤할 수 있었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항서가 공 제일 잘 찬다"는 소문이 났다.
2. 10대, "나는 축구선수가 될 거야" - 꿈을 향한 집착
1972년경, 박항서 13세.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축구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가입했다.
정식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고, 비록 장비도 부족하고 운동장도 좋지 않았지만 매일 연습에 참여했으며,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혼자 연습하고 방과 후에도 늦게까지 남아서 공을 찼다.
가족들은 걱정했는데, 아버지는 "축구 그만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축구로는 밥 못 벌어먹는다"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우리 집 형편에 축구선수가 어디 있느냐"며 한숨을 쉬었지만, 박항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축구선수가 될 거예요. 꼭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고, 부모님은 고개를 저었지만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1975년경, 박항서 16세.
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인 광희상고에 진학했는데, 이곳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축구 유망주들과 함께 훈련했고, 아침 6시에 일어나 새벽 훈련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또 훈련했으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경기를 뛰었는데,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코치가 박항서를 불렀다.
"항서야, 너 축구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는데, 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왜요, 코치님?"
"재능이 뛰어난 건 아니잖아. 네가 이 팀에서 제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박항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빠르고, 힘세고, 기술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그들은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훈련받았으며, 자신은 헝겊공으로 시작한 늦깎이였다.
"하지만 코치님,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래도 해볼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코치는 박항서를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 고집은 대단하네.'
3. 20대 초반, "드디어 프로다!" - 선수로서의 시작
1979년, 박항서 20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건국대학교 축구부에 들어갔고, 대학 리그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천재적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성실함과 전술 이해도가 뛰어났으며, 특히 수비수로서 위치 선정과 판단력이 좋았고,
감독들이 신뢰하는 선수가 되었다.
1983년, 24세에 드디어 프로 선수가 되었는데, 대우 로얄즈(현재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했고, "헝겊공으로 시작한 서산 소년이 프로 선수가 되다"라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 실렸으며, 부모님도 이제야 아들의 선택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선수 생활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성실했다.
박항서는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고,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선수도 아니었으며, 화려한 개인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위치를 지키는 수비수였다.
하지만 감독들은 박항서를 좋아했는데, "시키는 대로 정확히 하는 선수", "전술을 이해하는 선수", "팀을 위해 뛰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10년 넘게 프로 무대에서 활약했다.
1990년대 중반, 선수 생활을 마치며 박항서는 생각했다.
'이제 뭘 하지? 축구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선수로서는 특출 나지 않았지만 전술 이해도가 높았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으며,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 30대 이후, "나는 감독이다" - 지도자로서의 성장
1990년대 후반부터 박항서는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팀에서 코치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고, 2000년대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로도 활동했으며,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일하며 세계적인 감독의 철학을 배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 옆에서 코치로 일하며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를 함께 만들었고,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세계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으며, 이 경험이 훗날 베트남 감독으로서의 자산이 되었다.
2017년, 박항서 58세.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제안이 왔다.
"베트남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주시겠습니까?"
박항서는 고민했는데, 베트남 축구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약체였고, 국제무대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박항서는 받아들였는데, "도전해보고 싶다", "이 선수들에게도 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18년, 기적이 시작되었다.
박항서가 이끄는 베트남 U-23 대표팀이 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 올랐고,
비록 우승은 못 했지만 준우승만으로도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으며, 베트남 전역이 열광했다.
같은 해 아시안게임에서 4강에 올랐고, AFF 스즈키컵에서 우승했으며, 박항서는 베트남 국민 영웅이 되었다.
베트남 거리마다 박항서 감독의 대형 포스터가 붙었고, "마술사 박항서"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가족처럼 사랑했고, 아이들은 "박항서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 결론: 헝겊공에서 베트남 영웅까지
박항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축구 사랑으로 채워졌는데, 7세에 헝겊공으로 축구를 시작했고 13세에 "축구로 밥 못 벌어먹는다"는 말을 들었으며 16세에 "재능은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축구로 밥 먹고 살 수 있겠냐?"
7세 소년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박항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헝겊공으로 연습했고, 새벽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재능이 부족하면 노력으로 메웠고, 선수로서 화려하지 않았지만 성실했으며, 지도자가 되어서도 계속 배웠다.
그리고 58세에 베트남으로 건너가 기적을 만들었는데, 동남아시아 약체 팀을 아시아 강팀으로 만들었고, 베트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박항서"라는 이름이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국인이 되게 했다.
박항서가 남긴 것은 트로피만이 아니었다.
"재능이 부족해도 노력으로 이길 수 있다." "성실함이 결국 승리한다." "꿈을 포기하지 마라."
이것이 박항서가 보여준 삶이었다.
7세에 헝겊공으로 시작했지만, 20세에 프로 선수가 되었고, 40대에 국가대표 코치가 되었으며, 58세에 베트남 감독이 되어 국민 영웅이 되었다. 충남 서산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베트남 9,000만 국민의 영웅이 된 것은, 축구에 대한 사랑과 끝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헝겊공으로 시작한 서산 소년에서 베트남 국민 영웅으로.
"축구로 밥 못 벌어먹는다"는 말을 이기고 마술사가 된 감독으로.
이것이 박항서가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헝겊공이 만든 기적의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인터뷰 및 자료
- 박항서 감독 각종 인터뷰 (KBS, MBC, SBS)
- 베트남 축구협회 공식 자료
- 대한축구협회 자료
참고 서적
- 『박항서, 베트남 축구를 바꾸다』, 스포츠조선, 2019
- 『한국 축구인 열전』, 대한축구협회, 2020
학술 논문
- 김성호, "박항서 감독의 리더십 연구", 체육과학연구
- 이동준, "베트남 축구 발전과 박항서 효과", 스포츠매니지먼트
관련 기관
- 대한축구협회
- 베트남 축구협회
- 한국프로축구연맹
※ 본 글은 박항서 감독의 공개 인터뷰, 다큐멘터리, 관련 서적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광희상고, 건국대, 1983년 프로 데뷔, 2017년 베트남 감독 부임, 2018년 AFC U-23 준우승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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