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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위인의 어린시절

장기려의 어린 시절,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고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다

by onary 2026. 1. 7.

"어머니, 저 사람들은 왜 약도 못 구하고 아파하나요?"

1920년경, 9세 소년 장기려가 물었다.

평안북도 용천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봤고, 약을 살 돈이 없어 고통받는 이웃들을 봤으며, 어린 장기려는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돈이 없어서 그렇단다. 의사에게 갈 돈도, 약 살 돈도 없어서..."

장기려는 그날 결심했다.

'나는 의사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해 줄 거야.'

 

1960년대 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의사가 돈 없는 가난한 노인 환자를 자비롭게 진료하는 모습. 평생 독신으로 살며 모든 것을 환자들에게 바친 성자 의사

 

그리고 50년 후, 이 소년은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었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했으며,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 청십자의료보험을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1950년 흥남철수 때 가족을 북에 남겨둔 채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남한으로 온 성자 의사가 되었다.

이것은 평안북도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의사의 꿈을 이루고,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친 헌신의 이야기다.

 

1. "가난해서 병원도 못 가는 사람들" - 9세, 의사의 꿈

1920년경, 장기려 9세.

평안북도 용천에서 자랐고,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가난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어머니는 살림을 꾸렸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끼니를 거르는 날도 많았으며, 장기려는 어릴 때부터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다.

마을에서 병에 걸린 사람을 봤다.

열이 나고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그냥 누워 있었고, 결국 며칠 후 죽었다. 9세 장기려는 그 모습을 보며 울었다.

"어머니, 왜 가난한 사람은 병원에 못 가요?"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돈이 없어서 그렇단다. 의사에게 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약을 사려면 또 돈이 필요하니까..."

"그럼 돈 없는 사람은 아파도 그냥 죽어야 하나요?"

"...그렇단다. 슬프지만 세상이 그렇구나."

장기려는 주먹을 쥐었다.

'나는 의사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해 줄 거야. 돈이 없어서 죽게 하지 않을 거야.'

9세 소년의 꿈이었지만, 평생을 지킨 약속이 되었다.

 

2. 10대, "의사가 되려면 공부해야 한다" - 노력하는 소년

1925년경, 장기려 14세.

일제강점기였고 조선 사람이 의사가 되기는 쉽지 않았지만, 장기려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학교에서 항상 우등생이었으며, 선생님들이 "기려는 머리가 좋다"라고 칭찬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새벽에 일어나 복습했으며, 가난해서 책도 제대로 없었지만 빌려서 읽고 베껴 쓰며 공부했다.

가족들이 걱정했다. "기려야, 너무 무리하지 마라. 건강이 나빠진다."

"괜찮아요. 저는 의사가 되어야 해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요."

1929년경, 장기려 18세.

경성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가난한 집안의 조선 청년이 최고의 의학교에 들어간 것이었고, 가족들이 기뻐했으며, 장기려는 "드디어 의사가 될 수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경성으로 올라와 공부를 시작했고, 의학 공부는 어려웠지만 장기려는 최선을 다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겠다"는 꿈을 잊지 않았다.

 

3. 20-30대, "의사가 되었다" - 평양에서의 진료와 가족

1933년경, 장기려 22세.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의사였고,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었으며, 장기려는 평양으로 가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결혼했고 아내와 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장기려는 9세 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고,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줬으며, 때로는 약값까지 대신 내줬다.

동료 의사들이 말했다.

"기려 선생, 그렇게 공짜로 치료해주면 선생이 손해 아닙니까?"

장기려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어릴 때 약속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하겠다고요."

 

4. 1950년, "가족을 두고 환자와 함께" - 흥남철수의 비극

1950년 12월, 장기려 39세.

6.25 전쟁이 터졌고, 중국군이 개입하며 북한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유엔군과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후퇴했고, 흥남항에서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장기려는 평양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내와 5명의 자녀가 있었다.

피난을 가야 했지만, 병원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들이 있었고, 장기려는 고민에 빠졌다.

"여보, 우리 같이 피난 가요. 아이들도 있잖아요."

아내가 간청했다. 장기려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소. 이 사람들을 두고 가면 다 죽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떡하고요? 우리 가족은요?"

"미안하오... 당신과 아이들은 먼저 피난 가시오. 나는 환자들을 돌보고 나중에 갈 테니..."

아내는 울었지만 장기려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장기려는 환자들과 함께 병원에 남았다.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약을 주었다. 며칠 후 환자들 상태가 나아지자, 장기려도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흥남항은 폐쇄되었고, 배는 떠났으며, 장기려는 북한에 갇혔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마지막 배에 탈 수 있었다. 미군이 의사라는 이유로 장기려를 태워줬고, 장기려는 혼자 배에 올랐다.

가족은 찾을 수 없었고, 아내와 5명의 자녀는 북한에 남았으며, 장기려는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배 위에서 장기려는 경악했다.

'내가... 무엇을 한 것인가. 환자를 구하려다 가족을 잃었다.'

 

5. 50-80대, "이제 나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다" - 부산에서의 헌신

1951년, 장기려 40세.

부산에 도착했고, 가족도 없고 돈도 없었으며,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장기려는 무너지지 않았다.

'가족은 북에 있지만,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다.'

부산 복음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며 모든 것을 환자들에게 바쳤다.

1968년, 장기려 57세.

청십자의료보험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이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소액을 내면 병원에 갈 수 있게 했으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나중에 이것이 국민건강보험의 모델이 되었다.

장기려는 평생 월급을 거의 받지 않았고, 병원 기숙사 작은 방에서 살았으며, 옷도 낡은 것을 입고 다녔다.

모든 돈을 환자들을 위해 썼고, "나는 이미 가족을 잃었으니, 가난한 환자들이 내 가족"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장기려 70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고, 전국적으로 존경받았으며, 많은 상을 받았지만 장기려는 겸손했다.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가족을 잃고도 어떻게 계속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까?"

장기려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9살 때 약속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하겠다고요. 그 약속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1995년, 장기려 84세.

부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가족 없이 죽었지만,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장기려가 치료해준 환자들, 장기려에게 도움받은 사람들, 장기려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장기려는 가족을 북에 남겨두고 평생 그리워했지만, 남한에서 수만 명의 환자를 구했고, 한국 의료보험의 기초를 세웠으며, "의사는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준 성자였다.

 

🌸 결론: 9세의 약속을 84세까지 지킨 의사

장기려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통 속에 있었다. 9세에 가난한 이웃이 병원도 못 가고 죽는 것을 봤고, 14세부터 의사의 꿈을 위해 공부했으며, 18세에 경성의전에 합격해 꿈을 이뤘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하겠다."

9세 소년이 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장기려는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22세에 의사가 되어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했고, 39세에 흥남철수 때 환자를 위해 가족과 헤어졌으며, 40세부터 부산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며 가난한 이들을 돌봤고, 57세에 한국 최초 의료보험을 만들어 수만 명을 구했으며, 84세까지 9세 때의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장기려가 남긴 것은 의료보험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 한 자신과의 약속을 평생 지켜라."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

"의사는 환자의 종이다."

이것이 장기려가 보여준 삶이었다.

평안북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의 꿈을 이뤘고,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무너지지 않았으며,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고, "한국의 슈바이처"로 기억되는 성자 의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9세에 자신과 약속하고 84세까지 지킨 의사로. 가족을 잃고도 환자를 선택한 성자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로.

이것이 장기려가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약속이 만든 헌신의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전기

  • 이재훈,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홍성사, 2001
  • 조정래, 장기려, 그 사람, 두란노, 2007

참고 서적

  • 복음병원 60년사 편찬위원회, 복음병원 60년사, 1999
  • 대한의사협회, 한국 의학의 선구자들, 2005

학술 논문

  • 여인석, "장기려의 의료 활동과 청십자의료보험", 의사학
  • 신동원, "한국 의료보험의 역사적 기원", 보건사회연구
  • 박형우, "장기려와 한국 현대 의학", 의료정책포럼

관련 기관

  • 부산 복음병원
  • 대한의사협회
  • 한국의학한림원

※ 본 글은 장기려 관련 전기,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3년 경성의전 졸업, 1950년 흥남철수 시 가족과 생이별,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 창설, 1995년 사망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